‘괜찮아’의 가면을 벗고, 이제야 ‘싫다’고 말한다

by 네버엔딩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싫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어른들이, 친구들이, 선생님이 말하곤 했다.


“넌 참 착하구나.”

“너는 이해심이 깊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기뻐야 할 칭찬 앞에서 나는 늘 뭔가를 감춘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싫다’고 말해서 생길지도 모를 갈등이 두려웠다. 내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고려하게 되었고, 내 욕구보다 타인의 기대를 앞세우며 살아왔다. 그렇게 나는 나를 조금씩 뒤로 밀어두었고, 결국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 속에 숨어버렸다.


대가족 속에서 자란 나에게 감정 표현은 사치였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자란 아이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타인의 표정을 읽는 데 능숙해졌고, 상대방이 불편해하기 전에 먼저 양보하는 법을 익혔다. 스스로는 그것이 '배려'라고, '돌봄'이라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돌봄이 아니었다. 진정한 돌봄은 나를 포함한 모두를 향해야 하는데, 나는 그 원 안에서 나 자신만을 제외시켰다. 마치 구명보트에 모두를 태우고 정작 자신은 차가운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나는 스스로를 돌봄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괜찮아'라는 말은 내 입에 붙었다. 속이 상해도 괜찮아, 힘들어도 괜찮아, 원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한 마디는 내 감정을 덮는 두꺼운 이불이 되었다. 그 이불 아래서 내 진짜 마음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몰랐는지도 모른다.


코칭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그저 갈등을 피하고 싶었고 내가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긴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싫다’라는 말을 삼켰고, 원하지 않는 제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고 말았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자꾸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걸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걸까?’ ‘내가 맞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안엔 나의 욕구와 타인의 기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내가 있었다. 조금만 기울면 죄책감이 밀려오고, 조금만 멈추면 이기적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을까봐 어디에도 발을 못 붙이고 살았다. 그렇게 나는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혼란스러운 사람으로 살아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늘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 내 삶의 핸들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나는 그저 조심조심 방향을 조율하는 조수석의 승객이었다.


심리학과 코칭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내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감정에 이름을 붙여 보았다. 분노는 분노라고, 슬픔은 슬픔이라고, 피로는 피로라고. 어색했다. ‘화가 난다’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정은 단지 신호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이, 화가 나면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나 자신에게도 말을 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내 안의 목소리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맞아.”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돌봄의 첫걸음이었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나 지쳤어", "나 속상해", "나 이건 싫어" 라고 말할 때, 이제는 "그래, 알겠어. 네 마음이 그렇구나"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싫다’고 말하는 것을.

‘이건 내 일이 아니다’라고 구분 짓는 것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에게 허락하는 것을.


그 다음은 경계 설정이었다. 'Boundary'라는 영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벽을 쌓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경계는 벽이 아니라 울타리였다. 건강한 울타리는 필요한 것은 들이고, 해로운 것은 막는다. 문이 있어서 열고 닫을 수도 있다.


'싫어요'는 자기 돌봄의 언어다.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자기 존중이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비행기에서 산소마스크가 떨어질 때 먼저 자신에게 씌우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어야 옆 사람도 도울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때로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내가 너무 차가운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예전의 따뜻한 내가 더 좋은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억지로 짜낸 따뜻함보다 진정성 있는 따뜻함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지친 채로 건네는 도움보다 에너지가 충만할 때 건네는 도움이 더 힘이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자기 돌봄을 시작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타인을 더 잘 돌볼 수 있게 되었다. 내 감정을 이해하니 타인의 감정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경계를 존중하니 타인의 경계도 존중할 수 있었다. 진정한 돌봄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순환이다. 나를 돌보고, 너를 돌보고, 우리를 돌보는 것. 이 순환이 건강하게 돌아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돌봄이 가능하다.


이제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진정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내 감정에 정직하고,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할 줄도 아는 사람. 그것이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이고, 결국은 이 세상을 돌보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돌봄의 여정은 끝이 없다. 매일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한다. '오늘 너는 어떠니?' '무엇이 필요하니?'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이제 나의 일상이 되었다. 가끔은 여전히 '괜찮아'가 먼저 튀어나온다. 오랜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아, 또 그랬구나. 괜찮아,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이것도 일종의 자기 돌봄이다.


돌봄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돌봄도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텅 빈 우물에서는 물을 길을 수 없고, 꺼진 촛불로는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오늘도 나는 나를 돌본다. 그것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조용히 대답한다. "아니야, 이것은 필수적이야." 그리고 그 돌봄의 에너지가 충만해질 때, 나는 기꺼이 그것을 세상과 나눈다. 진정성 있게, 기쁨으로, 사랑으로.


이것이 내가 찾은 돌봄의 길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하고, 때로는 서툴지만 진정성 있는. 무엇보다, 나를 포함한 모두를 향한 돌봄의 길이다.

keyword
이전 07화관계회복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