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과 아들러 심리학을 배우면서, 나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적인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내가 무심코 받아들인 역할, 침묵으로 유지해 온 경계없음, 상대의 욕구를 나의 책임처럼 짊어진 흔적들이 있었다. 그 모든 흔적들의 중심에는 잘못된 돌봄의 패턴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면서 고된 삶이 시작되자 나는 뭐라도 엄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엄마 대신 식구들의 저녁밥을 책임졌다. 엄마도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엄마를 향한 동정심이었을까. 어떻게 어린애가 그럴 수 있냐면서 처음에는 어른들이 칭찬을 했지만, 그것은 곧 나의 책임이 되었다. 내 공부가 방해가 되었지만 나는 그것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고 용기있게 말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억울했지만 묵묵히 해냈다. 어른들은 나를 착하다고 칭찬했지만, 나는 속으로 그게 아니라고 외치면서도 거부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억울함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돌봄이 아니라 경계 없는 희생이었다. 그런 희생은 나를 소진시키고, 동시에 상대방에게도 건강하지 않은 의존을 만들어냈다.
이런 일은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지속되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연스럽게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오지랖 대마왕이었다. 종가집 맏며느리로서의 정체성과 친척들로부터 받는 인정이 그녀의 삶 자체였다. 집안의 구세주 역할을 기꺼이 감당해왔던 시어머니는 이제 나까지 거기에 끼워 넣으려고 했다. 그 경계는 시할아버지의 사촌까지 뻗어 있었고, 도와달라는 요청이 없었음에도 늘 그네들을 이모양 저모양으로 도와주는 모습이, 내 눈에는 쓸데없는 오지랖이었고,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비추었다.
시어머니는 나를 종처럼 부려 먹고 싶었지만, 나의 직장생활이 방해물이었다. “여자가 결혼하면 지 인생이 어디있냐고 아이들을 위해, 식구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며 내가 회사 다니는 것을 싫어하셨다. 나는 원래부터 일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시어머니에게 엮이지 않으려면 더욱 회사를 그만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친척들에게 천사처럼 좋은 시어머니가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나를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다. 시어머니의 돌봄은 진정한 관심이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배우고 나서, 시어머니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말하는 라이프스타일이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삶에 대한 무의식적인 해석 방식, 즉 “나는 이런 사람이고, 타인은 이런 행동을 하며, 그래서 세상은 이런 곳이다”라는 삶의 기본 전제들이다.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에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일생 동안 그 프레임으로 살아간다.
시어머니의 라이프스타일은 ‘통제 추구’와 ‘즐거움 추구’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강했다. 여기서 ‘즐거움’은 영어로 pleasing으로 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즉 나의 헌신과 수고로 남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타인을 도우며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는 방식, 그것은 그분의 생존 방식이었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의 라이프스타일을 알게 되자 그동안의 이해되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행동들이 확연하게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다르다.
시어머니의 과거와 심리를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불편함까지 감수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아들러가 말한 ‘과제 분리’가 빛을 발한다. 아들러의 과제 분리의 핵심은 “이 일이 누구의 과제인가?”, 즉 그 과제를 결정하고 결과를 책임질 사람이 누구인지를 구분하라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타인의 과제에 끼어들거나, 내 과제를 남에게 맡기면서 갈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말한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고, 자신의 과제는 스스로 책임져라.” 그리고 “거절했을 때 상대가 나를 싫어할 자유도 허락하라.”
그 사람이 실망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은 그 사람의 과제라는 것이다. 나를 싫어할 때 미움받을 용기를 기꺼이 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움받을 용기인 것이다. 이 말은 관계에서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이다. 시어머니가 뭔가를 하면서 나를 끼워 넣으려는 것은 시어머니의 과제이다. 그것을 따를지 말지를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내가 거절했을 때 시어머니가 서운해하고 때로는 노여워할지라도 그것은 그분의 과제이지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은 아니다.
이 원칙은 시어머니를 포함한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를 훨씬 자유롭게 해 주었다. 예전엔 그분의 태도와 간섭이 몸서리치게 싫었고 나는 늘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침묵과 수용이 시어머니의 그 패턴을 유지하며 고착시켰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지금껏 인간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타인의 과제까지 짊어지고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이건 누구의 과제인가?”
이 질문 하나가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는지 모른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듯한 죄책감이 올라오기도 하고, 거절한 후에 뒤따르는 서먹함이나 불편함에 잠시 흔들릴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과제 분리’는 나를 차갑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상대 사이의 경계를 존중하는 따뜻한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그 덕분에 관계 속에서 나는 더 내 중심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돌봄은 경계가 없는 희생이 아니다. 상대방의 모든 욕구를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돌봄은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돕되,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도 자신의 과제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돌봄은 나를 소진시키지도 않고, 상대방을 의존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서로가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중받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돌봄 관계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딸이고, 며느리이고, 엄마이고, 아내지만, 이제는 그 모든 역할보다 먼저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중심에 두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아야 어떤 관계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돌봄은 역할이 아니라 선택이다. 며느리라서, 딸이라서, 엄마라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행동이다. 그 선택에는 언제나 경계가 있어야 한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 할 수 없는지, 무엇은 내 과제이고, 무엇은 상대방의 과제인지 구분해야 한다. 이러한 명확한 경계가 있을 때, 돌봄은 비로소 건강해진다. 이것이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돌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