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떠나야만 살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상처

by 순간
모든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c : insta @framelight_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결국 떠나는 법을 배운다.

집을 떠나기 전, 나는 매일매일

살아남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능력도, 경험도, 경력도, 돈도 없던 21살인 나는

다른 사람들도 무릇 그렇듯 독립을 꿈꾸었다.

다만 꿈의 계기만 평범하지 못하였을 뿐,



그날의 상처



어릴 적, 나를 좋아하던 동갑내기 남자아이가 있었다.

사는 아파트도, 학교 반도 달랐지만

학원에서 알게된 친구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후문과 붙어있는 아파트 상가의 수학 학원을 다녔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학교를 지나

정문 맞은편의 영어 학원으로 향했다.





어느 날부터,

그 애는 수학 학원을 마치고 영어 학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간식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위한 간식을 들고 한 시간이 넘게 서있었다.



늘 그랬듯 익숙한 골목, 늘 그랬듯 기다리던 아이.

그 애는 손에 간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웃었고, 그 아이도 웃었다.

그 순간이 좋았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 친구의 감정을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 아이를 좋아했다.




가족들과 차에 타 고속도로를 지나가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가족들과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던 그때,

문득 그 남자애가 생각이 났다.


가족들에게 날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나도 그 아이가 좋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 가볍게 꺼낸 말이 화근이었다.



"야, 너 걸레야?"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며칠 전, 입술을 오므려 찍은 셀카를 보여줬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몸 파는 여자 같다


그 말이 머리를 스치더니,

이번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도 있던 자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던 장소였기에

당황스럽기만 하였다.



"그래, 니는 걔한테 먹을 거 몇 번 사줬는데?"


" 몇 번 없어, 그래도 난 한 번 사줄 때 되게 많이 사줬어."


"그거랑 그거랑 같나. 싫다고 거절은 했어?"


"아니, 나 걔 좋아하는데 왜 싫다고 해?"



언니는 비웃듯 말을 얹었다.




"거짓말하네. 걔가 먹을 거 사줘서 좋아하는 거겠지"

"그래. 네가 꽃뱀이야? 창녀들이 하는 행동이랑 똑같네"

"먹을 거 줬다고 실실거리면서 웃으니까 계속 따라다니지"

"엄마, 내가 저번에 학원에서 봤는데,

쟤 그 남자애가 장난치니까 좋다고 꼬리 치더라.

둘째 이모도 그러잖아. 피 물려받은 거 아니야?"





내 나이 12살이었다.



나의 감정이 찌그러진 순간이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애를 좋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나를 욕하며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생존을 위한 선택들


그날 이후,



욕설과 비웃음, 조롱은 일상이 되었다.

그들은 나를 깎아내리며 서로를 더 가까이 했다.



특히 어머니와 언니는

서로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해야만 하듯이,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마다

혹 두 명 중 한 명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나에게 독을 뿌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집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립이 필요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남자를 꼬시러 다닌다'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과 추궁이 더 심해졌다.



어머니와 언니는 나를 앞에 두고

'몸으로 남자를 꼬시는 둘째 이모와 빼닮았다'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으며,

이웃이 우리의 싸움 소리에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합법적으로 집 밖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했다.



밤까지 운영하는 학원, 주말 프로그램, 봉사활동.

수치로 남는 것들을 하며 밖을 나돌아 다녔다.

중학생 시절에만 150시간의 봉사를 했고,

생기부용 활동도 꾸준히 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바깥에 있으려 했다.



도피와 좌절의 반복


그리고 중학교 3학년,

가족들과 멀어지기 위해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택했다.



숨을 쉬고 싶었고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



떨어질 수 없는 학교, 본가와 먼 지역, 실습이 많은

특성화고였다.



네 엄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특성화고?
너 일부러 그러지? 나한테 복수하려고?


예상대로 반대는 격렬했다.

하지만 나는 버텼고, 결국 입학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물리적으로 가족과 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무조건 붙어야 하는 기숙사 학교에만 눈이 팔려,

특성화고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였고

힘겨운 학교생활은 날 다시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교육과 실무로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그러자 가족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부모님은 '특성화고를 졸업한 딸'이라는

명패 따윈 받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 믿고, 회개하고, 사람이 되어서 와라.



그렇게 나는 해외 기독교 학교로 보내졌다.



진짜 독립을 향해


한국과는 다른 학제와 언어의 장벽.

나는 고등학교를 1년 반을 더 다닌 끝에

스물한 살 5월, 고등학교를 졸업장을 받게된다.



그리고 그 해 6월,

나는 마침내 진짜 독립을 준비한.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성장기의 한 장면이거나,

혹은 믿을 수 없는 유년 시절일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하루가 생존이었고,

살아 있는 것이 이기는 것이었다.



나는 가족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사랑을 받지 못해도,

나 자신을 키워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많은 슬픔과 욕구를 누르고

여전히 살아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입고,
그 상처를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내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떠나도 된다.
도망이 아니라 생존이다.
배신이 아니라 회복이다.

불효가 아닌 치유이다.



돈이 없어도, 경력이 없어도,

짧은 시간 동안 삶이 조금

비참해 보여도 괜찮다.



당신을 망가뜨리는 사람 곁에 남는 것이
당신을 지키는 일은 아니다.




이 글이 당신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길 바랍니다.

빛나고 흔들리는 순간을 기록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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