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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세대와 세대를 넘는 우정에 대하여

쓸모, 즐거움 그리고 덕을 나누는 관계

by 빛숨 김광화

아이들과 내가 캠프를 나름 즐겁게 이어가자, 부모들이 내게 바란 적이 있다.

“참여 인원을 좀 늘리면 어때요?”

“글쎄요. 전 상관없는데 아이들이 바라는지 물어봐야겠지요.”


두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 둘 다, 듣자마자 곧바로 "아니요!". 너무 뜻밖이다. 그 단호함이란! 어쩌면 학교에서 이미 충분히 많은 아이와 부대끼는 데 굳이 캠프에서까지 부대끼고 싶지 않다는 걸까?


아이들과 관계가 이어지고 또 조금씩 깊어지다 보니 많은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된다. 서로 정이 생기고, 우리 관계가 점차 가족이라는 느낌에 가깝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만도 아닌 거 같다.


그러다 최근에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우정론’을 읽으면서 아이들 마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우정(philia)을 세 가지로 나눈다. 쓸모, 즐거움, 덕에 근거한 우정으로. 이 가운데 덕을 기반으로 한 우정(friendship of virtue)이 가장 완전하고, 지속적이며, 진정한 우정이라고. 쓸모에 따른 우정은 쓸모가 사라지면 끝난다. 즐거움 역시 마찬가지.


그럼, 그가 말하는 '덕 우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 덕은 이성(logos)에 따라 행동하는, 선한 성품을 뜻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그 내용이 추상적이라 내가 소화하는 만큼 받아들일 수밖에.


내게 깊이 와닿은 내용은 '성장'에 관한 이야기. 그는 우정의 본질을 '서로 성장하는 관계'로 본다. 친구의 선을 기뻐하며, 서로 좋은 점을 배우고, 결점을 고쳐주는 관계. 이 얼마나 좋은 관계인가. 과연 그런 관계가 가능할까?


서로 성장하는 관계


먼저 나를 돌아본다. 먼저 내 우정은 어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뛰어놀던 우정부터 대학을 거쳐, 지금까지. 어린 시절 우정이란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던 기억을 토대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정이란 한두 사람. 그것도 어쩌다 안부를 묻는 정도다. '쓸모'가 줄어들면서 관계도 희미해진다.


대학 시절 우정이 가장 열정적이었다. 민주화 운동과 야학운동이라는 ‘의로운 쓸모’에 의기투합했고, 지금도 부분적이나마 우정이 이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서로에게 쓸모와 즐거움은 점차 빛을 잃어가는 편이다. 몇몇은 벌써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지금 내 우정의 가장 큰 비중은 아내다. 우리 부부는 자녀들이 독립한 뒤로, 부부라는 '법적인 관계보다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즉 서로에 대한 의무나 간섭은 없애고, 필요한 부분은 상대방에게 부탁하는 관계로. 그래서일까. 지금 우리 우정은 쓸모와 즐거움을 그런대로 나누는 편이다.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따로 또 같이' 일하고, 밥 해 먹고, 이야기 나누고, 산책하는 일상의 소소한 쓸모와 즐거움을 누린다. 하지만 덕이라는 눈으로, 서로 성장하는 관계로 우리 우정을 다시 들여다본다면 아직 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게 내 느낌이다.


그러면서 내 생각은 다시 아이들로 돌아온다. 나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쓸모와 즐거움으로 맺어졌다. 아이들은 나를 필요했고,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아이들이 좋았다. 아니, 이제는 쓸모나 즐거움보다 차라리 소중함에 가깝다. 이 책 앞부분에서 다룬 많은 내용이 이를 잘 말해주지 않는가.


그럼, 서로 성장하는 관계는 어떨까?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 아이들을 보는 느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덕 우정에 가깝다. 아이들 덕에 내가 배우고 느끼고 또 성장하는 게 참 많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정한 친구는 서로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친구를 자신과 같이 아끼고 사랑한다. 친구를 '또 다른 자신(another self)'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구를 통해 자신의 덕성을 확인하고 또 완성하려 한다.


친구는 '또 다른 자신(another self)'


참 멋진 이야기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과연 그런 친구가 진짜 있었을까 싶다. 내 의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렇다. 또래 우정은 주로 즐거움이란 차원에서 시작되고,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덕과 선을 기반으로 완성된단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우정은 세대를 뛰어넘어, 두 사람의 품성과 도덕적 선택이 만나 형성된 ‘영혼의 조화’에 가깝다고. 예컨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우정은 가능하단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부부는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과도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는 편이다. 지금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는 세대를 넘고 또 한 번 더 넘는 관계다.


이쯤에서 나는 아이들이 당분간 캠프 인원을 늘리는 걸 바라지 않는 걸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실 끊임없이 경쟁에 휘둘리는 요즘 아이들은 또래 친구끼리 서로 성장을 기뻐하기는 쉽지 않으리. 셋만 모여도 따돌림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 폭력도 적지 않다. 친구를 놀리고 장난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 환경에서 참된 우정으로 나아가려면 처음에는 적은 인원이 더 좋으리라. 적을수록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더 집중하며, 더 애정을 기울일 수 있을 테니까.


실제 두 아이는 서로를 참 소중히 여긴다. 살가운 형제랄까. 계절별로 오랜만에 보니 좋은 점을 더 많이 보는 거 같다. 나이로 한 살 차이지만 서로 자극받고, 서로 성장을 기뻐하더라. 그 어디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관계의 즐거움’을 누린다.


아래 사진은 죽마라는 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죽마는 상당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형은 이 놀이가 갖는 원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죽마를 타는 건 동생이 더 잘한다. 아이들은 한 번씩 탈 때마다 조금씩 나아진다. 처음에는 두 발을 죽마에 올리는 것조차 안 된다. 한번 할 때마다 조금씩 나아진다. 그럼, 서로 기뻐하고, 또 서로 자극을 받는다.

죽마 놀이 1.jpg 둘이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다. 서로 배려하고, 서로 기뻐하고...

이러한 관계는 이전에 우리가 함께 했던 거의 모든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형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실제 이를 말로 표현하는 건 서투르다. 글 쓰는 건 참 좋아한다. 동생은 말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고, 글쓰기는 서투르다. 동생은 형한테 외국어를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고, 글쓰기도 부쩍 자극을 받는 거 같다. 형은 동생의 막힘없는 표현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사실 형과 동생이란 표현은 나이 차이에 따른 '말'일 뿐이다. 아이들은 그저 서로를 친구처럼 여긴다. 물수제비 놀이를 할 때도 그렇다. 서로 이래도 해보고 저래도 해보면서 조금씩 서로 나아지는 걸 기뻐하더라. 형이 바이올린을 켜는 걸 보더니 당장 동생도 바이올린을 사서 배우더라. 학교 또래 아이들 가운데도 악기를 잘 다루는 친구들은 얼마나 많겠나. 그럴 때, 이를 기뻐하기보다 솔직히 부러움을 느끼는 편이다. 아니면 열등감에 젖든가. 경쟁하듯 성장하는 아이들끼리 덕 우정을 말하는 거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AI 시대, 우정이야말로 보듬을 가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향의 우정을 말했듯이 나 역시 새로운 꿈을 가진다. 우리 서로가 덕에 기반한 우정을 자각하고 또 점점 깊어진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아이들을 받아들일 용기와 관대함 그리고 친절 같은 덕을 갖지 않을까? 기대한다.


문제는 나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성장한다. 만날 때마다 놀랍다. 존재 자체가 성장과 뗄 수 없다. 거기에 견주어, 나는 몸이 늙어가는 존재. 나 스스로 성장한다고 여기는 건 뭘까?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쓸모와 즐거움을 넘어, 덕으로 다가가는 부분이 있을까? 내 입으로 굳이 하나를 들자면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정도가 아닐까. 그 외 뭐가 더 있을까?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덕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 나는 생각할수록 끌린다. AI 시대로 깊어질수록 그 뜻이 더 깊게 다가오는 거 같다. 오랜 세월, 친구 사이 주고받던 많은 쓸모와 즐거움이 이제는 점차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럴수록 사람만이 가지고 또 나눌 수 있는 덕 우정이 더 돋보이지 않겠나?


어쩌면 이렇게 글로 만나는 '글벗'도 덕 우정을 나누기에 좋으리. 나이나 지역을 떠나, 서로 좋은 점을 배우고 또 함께 성장을 기뻐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서로 보완했으면 하는 부분은 친밀도에 따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역시 자기 거울로 여기면 그리 어려울 거 같지는 않다. 여러분은 어떤 우정을 추구하는가?


#자녀교육 #우정 #아리스토텔레스 #쓸모 #즐거움 #덕 #글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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