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으로 출발하기 위해 자전거에 오르다 코레일 어플을 열었다. 미리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21분으로 알고 있던 기차 시간은 39분이었고 20분 정도 지연이 예상되어 있었다. 요즘 기차를 타면 흔한 일이다. 시간이 너무 남는다.
당황하기도 잠시, 나는 지척의 북카페로 향했다. 마침 가방 안에 든 노트북을 꺼내 어제 쓰다만 서평을 써야겠다. 책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이다. 이 고전으로 독서회의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달아오를 줄 몰랐다. 물론 나 역시 만만치 않게 흥분한 상태였다. 타인의 말에 끼어들어 말을 보태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평을 쓰던 나는 썌함을 느끼고 챗GPT를 열었다.
부조리가 세계에는 의미가 없는데 인간들이 그 의미를 찾으려 하니까 발생하는 충돌이잖아? 그런데 실존주의자들은 ‘신이 없거나 침묵할 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라고 하고. 이건 앞뒤 말이 안 맞는 거 아님?
그리고 나는 충격적인 답을 전달받았다. 이럴 수가! 어제 독서회에서 한참 실존주의와 부조리에 대해 떠들어댔는데…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엄연히 둘이 다른 거였다니! 까뮈가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니! 때린 사람도 없이 혼자 거하게 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까뮈의 부조리는 사르트르를 필두로 한 실존주의를 비판하며 시작된 이론이다. 출발점은 모두 2차 세계대전 이후 좌절에 빠진 인간이었다. 누군가는 신이 죽엇다 말했고 그가 죽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침묵한 건 사실이었다.
실존주의자들은 그럼에도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극복’이다. 반면 부조리는 '수용'을 택한다. 의미 없음 자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저항’이고 ‘자유’다. 확연히 다른 스탠스다.
김애란 작가가 북토크 때 그런 소리를 했었다. AI는 아는 건 어떻게든 아는 척을 하는 모범생 같다고. 그런 그가 가만있을 리 없다. 내게 하나를 물어온다.
원하신다면,
� 카뮈와 사르트르가 실제로 “이 문제(부조리 vs 실존)” 때문에 결별한 에피소드도 소개해드릴까요? 두 사람은 원래 친구였는데, 이 철학적 입장 차이로 거의 원수처럼 갈라져요 — 문학사에서 꽤 유명한 사건이에요.
둘은 20세기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던 철학적 형제이나 라이벌 같은 존재였다. 둘의 균열은 의외로 정치적 행동에서 드러났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행동으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므로 억압을 끝내려면 혁명과 폭력도 정당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혁명 같은 것! 그러나 까뮈는 폭력은 또 다른 부조리를 낳고 어떤 대의명분도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하면서 둘은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는 결별로 이어진다.
그런데 까뮈의 부조리를 이해할수록 의문이 들었다. 그는 부조리를 깨달아도 자살하지 않고 수용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라고 했다. 그 단계를 ‘시지프스의 미소’라고 표현했다.
근데 수용까진 좋지만 혁명도 없이 부조리한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죽는 게 과연 인간의 존엄인가?
역시나 챗GPT는 그 질문 정말 훌륭하다며 나를 추켜 세웠다.
이게 바로 까뮈 철학의 가장 어려운 지점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부조리의 수용은 체념도 굴복도 아니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꾸며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사제 앞에선 신을 거부했다.
감정을 꾸며서 사회의 규범에 맞추지 않는다는 솔직함을 가진 뫼르소. 그는 그 솔직함을 지키는 형태로 부조리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 인간이고 싶었다. 처형식에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길 원한다는 것은 거짓 없는 자신으로 죽을 수 있다는 존엄 그 자체다.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절대적인 의미나 도덕적 질서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처음엔 사르트르 입장에 기울었다. 그런데 어째 입안이 깔깔하다. 우선, 내게 그만한 용기가 있는가? 글세… 나 같은 사색적인 인간에겐 부조리 철학이 선호와 상관없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