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결혼을 결심한 지인이 예비 배우자와 교제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 둘은 몇 년 전 짧은 교제를 했지만 인연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주변의 소개로 재회했다니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고 하나보다. 지인은 그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진 이유가 결정적이라고 했다. 아마도 자신이 불안이 높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다는 고백도 함께였다.
- 당신은 안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군요.
사실 나는 그가 과거에 겪은 어려움을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파편 하나가 지금까지도 이렇듯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안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일까? 불안이 높아, 사람에게서 안전을 찾는 부류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억의 덮개가 슬며시 걷히며 하나의 얼굴이 드러났다. 과거의 남자친구였다. 그는 나를 정말 편하게 생각했다. 장난처럼 나를 ‘엄마’라 불렀고 내게 붙어 있으면 잠도 솔솔 온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내가 그를 지켜야 할 사람처럼 느껴졌다. 불이라도 나면, 내가 그를 데리고 뛰쳐나와야 할 것처럼.
그때의 우리가 안전의 욕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불안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그는 내게서 안전을 느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걸 지금은 분명히 알겠다. 그래서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별의 이유는 달랐더라도 그것은 형체를 달리 했을 뿐, 불안과 안전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지인과의 대화 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봤다. 오래전부터 방치된 공간 속 안부게시판에는 내가 남긴 흔적, 그러니까 아마도 그로선 있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덕분에 살아남은 나의 오래된 질문이 남아 있었다.
- 게으름과 싸우고 있습니까?
그 아래엔 19년 전 그가 단 댓글도 있었다.
- 녜 ㅠ,.ㅠ;; 아마도
그걸 보는 내 마음이 참으로 묘했다. 시간 속에 화석이 되어버린 관계. 저 문장을 타이핑할 땐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만개한 꽃이 어찌 시든 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계가 한때 그런 꽃이었다.
복학 후의 나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그 시절 만남을 시작한 그 친구는 내 삶에서 추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불안한 삶 속에서도 일상에 머물러주게 해주는 무게. 평범한 삶을 살게 해 주던 사람. 그것도 안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관계 속의 정서적 피난처가 아니라, 삶을 지탱해 주던 감각 전체일 테니까. 어린 나는 안전이란 감각을 너무 좁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기쁘게 웃고 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의 증거 같은 존재였기 때문.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한 번쯤은 더 만나도 좋을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그 증거일 테다. 그때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오래된 평온이다.
하늘은 높고 말을 살찌는 가을, 누군가가 그리운 것은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잠시나마 ‘안전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그 시절을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