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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게 도착한 인정

딸의 아버지 자서전 출간기

by 은섬


아버지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오롯이 내가 이뤄낸 성과였고 내 독립출판사의 네 번째 결과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문방구에서 아주 신중하게 비싼 펜을 골랐다. 그 펜을 손에 꽉 쥐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썼다고 했다. 여든 노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에겐 더욱더. 아마 그의 인생에 가장 오래 펜을 잡은 시간일 게 분명했다.


그렇게 건네받은 아버지의 글은 유년시절에서 시작해 군대를 제대한 시점에서 끝나 있었다. 거기에 엄마나 우리 형제자매 이야기는 없었다. 그게 꼭 우리가 아버지의 삶에 의미 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기록된 20여 년의 삶조차 지금껏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아빠는 언제나 그 시절을 분해했다. 이야기는 언제나 비난과 경멸과 저주로 끝났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독립출판까지 하게 된 건 나에겐 당연하고 아버지에게도 큰 행운이었다. 오랜 염원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너무 늦기 전에! 마음만큼 의욕만큼 쉬지 않았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감도 안 잡혔다. 무학자치고 잘 쓰셨지만 그게 손이 덜 갈 만큼 훌륭하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지난여름, 밤마다 북카페서에서 글을 정리하고 수정했다. 당사자에게 사실 확인을 하고 맞춤법이나 문장의 자연스러움을 꼼꼼히 체크해야 했지만, 욕심을 부리면 지레 포기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족하게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물성을 지닌 형태로 내고 보자고 힘을 냈다. 한 마디로 이건 아버지를 위한 나의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그렇게 지난 10월 편집을 완료하고 자가출판플랫폼에 파일을 업로드했다. 본래 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방식이 맞았다. 그는 한 명이라도 자기 억울한 사연을 알아주길 바랐다. 책이 판매된다고 해도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그는 모를 거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삶이 아침드라마로 제작되면 여러 사람의 눈물을 뺄 거란 사실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책을 받는 날, 아버지에게 출간 소식을 알렸고 그날이 가기 전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나이 들어 대문자 F가 되어버린 아버지는 이미 큰 울음을 삼킨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아는 얘긴데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단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이후 그 책을 읽은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사셨냐? “라는 질문은 그의 삶에 대한 타인의 첫 인정이었다.


작업을 하며 나는 아버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껏 나는 그의 비과학적이고 주관에 치우친 말들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활자가 주는 거리감에 머리가 식었다. 과거엔 그가 받은 부당한 대우에 분노했다면, 이젠 ‘그게 꼭 시기와 질투 때문만은 아니겠구나!’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맨날 징징거리고 잘난 척은 해대니 형제들이 미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안쓰러운 삶인 건 변하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과 돌봄 그리고 인정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그 어느 것 하나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가족이라면 버려버리는 게 맞지만, 그건 사랑과 돌봄과 인정을 받아본 이가 부릴 수 있는 오만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삶이 너무 깜깜해서 어떤 가능성도 볼 수 없었다고 얘기했고 그 말은 그의 삶에 대한 가장 정확한 요약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책장에 아버지의 자서전을 꽂으며 드디어 아버지의 과거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자서전을 만들어드려야겠다고 생각 후 그 다짐을 꺾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날 너무 힘들게 해서였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는 고작 ‘자서전 안 내드려야지!’ 정도의 혼잣말이었다.


그에게 부당했던 삶에의 분노, 반복되는 그의 저주에 대한 지긋지긋함은 옅어지고 그 빈자리를 더 깊은 연민이 차지했다.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되면서 받은 선물이었다. 지금도 이어지는 그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다. 아버지, 이제 내리사랑이 아닌 올리사랑을 받으시라. 그리고 책으로 남아야 할 삶들에 대해 더 큰 관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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