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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셀프 침묵 가이드

by 은섬

카톡 소리에 잠을 깼다. 본능적인 손동작으로 확인한 화면엔 부고장이 날아와 있었다. 같은 모임에 몸담고 있는 이의 부친상 알림이었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워낙 고령인 탓에 지난 모임에도 그의 마지막에 대해 여상하게 대화를 나눴었는데도 그랬다. 장례식장으로 향하기 전까지 ‘황망’이란 단어에 쫓겨야 했다.


아직 도우미도 오지 않은 그곳에 홀로 있는 지인을 보자 마음이 울컥이며 새어나갔다. 지난밤 손톱이 보라색으로 변해 때가 왔다 생각하며 아버지 곁에 잠들었다는 그녀. 격한 숨소리 후 확인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셨더란다. 그 마지막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오전 내 그곳에 앉아 있으며 알게 된 건 장례식장을 일찍 찾은 이들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사실이었다. 남편도 아이도 없는 그녀가 아버지를 보내고 그곳에 혼자 있을까 봐 저어하는 마음. 그곳을 나서는 발걸음이 내내 무거웠다.


독서모임에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과연 미래, 그것도 불행한 미래를 알고서도 그 삶을 선택할지 묻는 꽤 심오한 내용이었다. 그때 참석자 중 한 명이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미래를 알고 있는 셈이라고. 죽음이란 확고부동한 미래를.


일찌감치 가족의 상실을 경험해서인지,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새 나의 죽음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아이라는 남겨진 존재가 있으니 그 생각은 좀 더 여러 갈래로 뻗어져 나갔다. 내가 바라는 내 장례식의 모습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중학생인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하나라도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 습격처럼 올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러면 아이는 새초롬하게 말한다.

“그걸 왜 엄마가 정해? 어차피 내가 할 건데 엄마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너무 맞는 말이었다. 내가 약식 장례식을 원해도 상주인 아이가 성대하게 하고 싶다면 귀신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래놓고도 죽음에 대해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얼마 전엔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 죽음의 순간이 짧다는 확답을 AI에게 받았다. 성인병이 있을 경우 죽음이 지척에 와도 쉽게 끝이 나지 않고 죽음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진다고 했다. 달리기를 계속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기뻐 아이에게 또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입을 열기 직전 이런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보다 먼저 떠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아이가 불편해하던 사실을 상기했다.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아, 나는 영락없이 우리 아빠의 딸이구나! 하는 허탈하고 조금은 어쩔 수 없는 자조의 깨달음이었다.


내가 꼬꼬마 시절에 아버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자주 아팠다. 잘 먹지도 못하고 아프기만 해도 며칠씩 구들장을 짊어지고 누워있어야 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아버지가 누워있는 걸 보면 보기만 해도 힘이 빠졌다. 쉽게 무기력해졌고 우울에 발목을 잡히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우리 자매 앞에서 ‘나 죽거든…’이란 소리를 자주 했다. 따지자면 죽을병은 아니었는데 오랜 질병이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러면 언니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마음이 여리던 언니였고 나를 엄마보다 살뜰히 챙기던 언니의 울음은 내게도 쉽게 전염되었다. 의미도 모른 채 언니가 우니 따라 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짓이었다. 자식 앞에서 죽음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그랬던 내가 아이 앞에서 내 죽음을 입에 올리다니! 아무리 죽음에 관해 굿 뉴스를 접해도 입을 닫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 남겨진 자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에 괜히 숙연해졌다. 이어령 교수는 “우리가 죽음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삶은 더욱 농밀해진다."라고 말했다. 이 또한 너무 맞는 말이고 또 위로가 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혼자서 하는 게 맞다.


2시간여 장례식장에 있었다고 그곳을 나서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반가웠다. 그 안에서 시체를 본 것도 아니건만 죽음의 부스러기가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가을빛이 완연한 천변을 좀 걷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찬란한 오늘 속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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