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나는 글보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 대단히 뛰어난 테크닉이나 내공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욕심은 있었다. 나의 사진 한 장을 보고 누군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의 옅은 가능성이라도.
처음 글을 쓸 땐 창작 과정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에 심취했다.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란 인간, 창의성과는 무관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소설이 잘 써졌다. 어쩌면 거짓말에 능할지도? 판타지 장르를 쓸 때는 나 자신의 창의성을 시험하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그 낯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남편이 13살에 엄마를 잃었고 그때 소설을 썼단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남편은 절대 글이란 걸 쓸 사람이 아니었기에 너무 놀랐다는 감상도 함께였다.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받아들이기 벅찬 현실을 견디기 위해, 자신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는 소설을 통해서라도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내 글쓰기의 이유도 비슷했다. 로맨스 소설을 쓰던 나는 ‘핍진성’이라는 대형 폭탄을 맞고 그제야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현실에선 대면할 수 없고, 그 방법조차 모르는 문제들을 나는 소설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원 가족,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끔은 복수하는 마음으로 소설 속 아버지에게 여러 시련을 주었다. 아버지는 악인이었다가 가여운 노인이었다가 죽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모습들이 내가 원한 색다른 현실이었을지도.
살면서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종종 마주친다.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가끔 궁금해진다. 저 사람에게 어떤 사연이 있다면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심하여 그럴만한 나름의 서사를 부여한다. 그가 범죄자라 해도 나는 그를 한 귀퉁이쯤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에세이 <소설 만세>에서 정용준 작가는 소설이 누군가를 변호하는 글이라고 했다. 고정순 그림책 작가는 책 <그림책이라는 산>에서 외롭고 힘든 누군가를 찾아내는 일이 예술이라고 칭했다. 누군가를 위해 달빛을 햇빛 삼아 달리는 마음도 예술이란다. 서로 표현만 다를 뿐, 타인을 이해하고 대상이 누구든 그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다.
내가 소설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용기’이다. 손홍규 소설가는 수업 때 글쓰기의 용기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뼈저리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물리적으로 글 쓸 때 필요한 용기들이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좋은 소재를 구상하고 그걸 글로 옮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 용기가 필요하다. 용케 글을 쓰기 시작했어도 매번 이 글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결론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보다 더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소재를 대하는 방식이다. 나는 소심해서 갈등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내가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갈등이 없는 상태가 편하다. 그러니 자주 ‘차라리 내가 참고 말지’ 해버린다.
이 방식이 내겐 비겁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당장 내 마음을 편하게 할지는 모르나 최소한 내게 정답은 아니다. 앞으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방법을 모른다.
이런 태도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주인공들의 갈등이 대단치 않다. 갈등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데다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니까 흐지부지하게 된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대면해서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힘이 부족하다. 나는 이것이 지레 겁을 먹고 어설프게 포기해버리는 용기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지 않고 그 방법을 찾으려고 글을 쓰는 거지만 아직은 그저 헤매는 단계다. 나는 글쓰기에서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글을 쓰는 일은 너무 어렵다. 쓸수록 더 어려워지고 ’이번엔 정말 쓸 수 없을지도 몰라’ 매번 출발선에 다시 서는 기분을 맛본다. 그렇지만 글을 쓰는 것은 결국 삶의 태도다.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계속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