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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Feb 11. 2024

사춘기 소녀의 해피 엔딩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

오늘 날씨라도 얘기하는 말투로 아이가 방콕에서 사 온 초콜릿을 다 먹었다고 했다. 그건 여행 중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으로 그걸 먹고 아이는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먹은 이유는, 그것도 남김없이 다 먹은 이유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였다. 두드러기라도 올라오면 엄마가 학교에 빼줄 걸 알고.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 놓고 고백하는 아이의 얼굴이 해맑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13살의 아이. 학생의 본분이 학교에 가고 배우는 일이지만, 어른이 출근하기 싫은 것처럼 아이도 학교 가기를 싫어한다. 내일 학교 빼주면 안 되냐, 내일 몸이 아플 것 같다는 질병 예고제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혹시라도 내일 아침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버틴다면 사실 엄마는 져주는 것 말고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이는 알까?     


싫은 이유는 한 가지다. 담임 선생님이 너무 싫단다. 사실 어느 학생이 담임 선생님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겠냐만 아이의 싫음은 그 정도가 심하다. 

    

아이는 하교 후 내도록 스마트폰과 한 몸이었다가 폰을 빼앗기고 잘 때가 돼야 할 말이 떠오른다. 진작 좀 하면 좀 좋아?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으면 건전지가 빠진 장난감처럼 잠이 드는 아이.     


종알종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드는 아이는 사랑스럽고 그 내용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8할이 담임 선생님 험담이라면 내 마음은 조금 달라진다. 날 선 비난, 섬찟한 저주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런 걸 듣고 있는 나는 흡사 고문을 받는 것 같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자유지만, 그냥 마음속에서만 하면 안 될까? 나 너무 듣기 힘든데…."     


부정적인 감정은 강물처럼 흐른다. 

지인과 티타임을 즐길 때 사춘기 아이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아이에게 받는 고문이 얼마나 괴로운지 토로한다. 그 괴로움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 하는 바람으로. 그때 아이들은 다 그런 거라고, 내 아이가 특별히 나쁜 게 아니란 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아이에게서 시작된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지나쳐 타인에게까지 흘러간다. 

어디 숨어 있었을까? 말을 하던 중 떠오른 생각.     


‘아이가 엄마에게 얘기하지 않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닐까?’     


모든 부모 마음이 같을 거다. 아이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기꺼이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이야기해 줄 것. 학원폭력을 당할 때, 죽고 싶을 때 결국 아무에게도 도와달라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좌절하는 아이의 모습을 자신의 아이에게 대입하길 원하는 부모는 없다.  

   

그러자 내용은 나빠도 기꺼이 엄마에게 이야기해 주는 아이가 고마워졌다. 마음을 바꿔먹으니 아이의 투정에 제법 장단을 맞추며 들어줄 수 있었다. 시대가 달라져 기꺼이 선생님의 그림자를 밟으려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현대적 의미로 선생님 자격이 부족한 교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엄마가 아이 맘을 조금 이해하게 돼도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의 마음이 달라질 리 없다. 그런 아이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보자!’ 정도. 그러나 말하는 사람에겐 고작 ‘며칠이지’만 당사자에겐 ‘며칠씩이나’라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이번 주 아이는 드디어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담임 선생님과 남남이 되었다. 어쨌든 해피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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