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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Mar 03. 2024

목정원 작가를 만나고 왔습니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북토크 후기

그럴 때가 있다. 당근 어플을 열었는데, 너무 좋은 조건의 물건이 딱 올라왔을 때. 조금만 늦게 봤다면 강력한 경쟁률로 채팅 시도조차 해 보지 못 했을 매물이나 나눔.  

    

이런 일이 그날 내게 일어났다. 인스타를 열었다가 팔로우 중인 독립서점의 피드에 목정원 작가의 북토크 소식이 있었다. 주인장은 작가에 대한 소개 글 없이 ‘네, 그렇습니다. 작가 목정원입니다. 긴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바로 참여 신청을 했다. 갈 길은 멀고 참가비가 있었지만, 문제는 전혀 되지 않았다. 듣기로 금방 40명 접수 인원이 마감됐고 그 이후로도 서점으로 여러 통의 문의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때 인스타에 접속하지 않았다면 뒤늦게 땅을 치는 것은 내 몫이었을 것이다.      


목정원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은 작년 4월이었다. 책 추천에 관해서라면 신뢰가 가는 지인이 개인적으로 이 책을 추천했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책의 제목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어렵지만 쉽게 쓰이지 않은 그 책이 좋아 야금야금 아껴 읽었다.  

   

북토크가 열리는 <주책공사>와도 인연이 있다. 지난달 친구와 방문했던 공간이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너무 번거로워 운전해서 갔고, 오랜 시간 머문 게 아님에도 주차비로만 만원 가량을 지불했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나를 알기에 잘 다녀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목정원 작가님을 만났다. 그녀의 첫인상은 ‘작고 여리다’ 였다. 그녀의 몸을 울리며 빠져나온 목소리는 가끔 떨렸다. 책을 읽을 때 참 많은 문장을 필사하며 읽었는데 ‘저런 사람이라서 그렇게 조심스럽고 사려 깊고 뜻깊은 문장이 흘러나왔구나‘ 알 수 있었다.     


공연예술 비평가인 그녀는 이날 극장이란 공간에 관해 이야기했다. 고대 극장은 조명이 없기에 야외에 존재해야 했다. 이후 실내로 자리를 옮겼고 프로시니엄이 무대를 갈랐고 관객은 어둠 속에 남겨졌다. 극장은 경계를 통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분리하고 프레임으로 관점을 제공하던 시대였다.   

  

이후 브레히트가 ‘담배 연극’이란 형식을 빌려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과 같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관객들이 연극에 몰입하는 것을 경계했고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시위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연극의 형태는 여전히 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극장은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다. 실내인 점은 여전해도 ‘블랙박스 씨어터’라 불리는 공간은 극의 성격에 따라 가변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야외로 나간 극장 역시 거리극, 옥상 위의 퍼포먼스 등 어디든 무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서나 관객이 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작가님은 여러 차례 연극과 삶의 유비에 대해 언급하셨다. 삶을 다른 무엇에 비유하는 일은 흔하고 나는 연극에 대해 무지하지만 여러 대목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삶이 연극을 닮았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공간이 연극의 무대라면 우리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이며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질문만이 남겨진다.      


지인의 책 추천으로 시작해 주책공사로 향했던 나들이 그리고 목정원 작가의 북토크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필연이 필요했을까? 어쩌면 그 인연은 내가 알아챈 지점보다 더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질문이 도착했고 이제는 내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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