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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버스를 놓쳤나?

깜박거리는 엄마 탓에

by 윤혜경



여린 심성의 두 딸을 크리스털 와인잔 대하듯 안전에 혼신의 힘을 다한 부모 역할이었지만, 극단적으로 빈 부분이 꼭 돌출하곤 한다.


돌아보면 서툰 엄마의 깜박임으로 인한 서늘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바른 자세의 두 아이와 따스한 이웃들 덕분에 바르게 유지되어온 지난 삶에 대해 새삼 감사하게 된다.


작은 아이 (작은 서울이)는 2살 반에 서울을 떠나서 한국의 2학년으로 돌아와 5학년까지 우연한 기회에 스카우트되어 3년째 지속하던 교육 관련 방송일을 멈추고, 시드니의 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하였다.


큰 아이 (큰 서울이)는 4살에 한국을 떠나 유아원부터 1, 2, 3 학년 과정이 없이 4학년으로 돌아왔다. 4학년 과정에서 한국의 첫 학교생활이 시작된 큰 아이는 2학년으로 시작한 작은 아이보다 더 많이 고단했다. 한 학년을 낮추어 조금 수월하게 적응하도록 해주는 지혜가 필요했는데...


전학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입학해서 다닌 아이도 어려워지기 시작한다는 4학년에 들어가서 퍽 고단했을 큰 아이는 한국에서 적응(?)을 해가던 중1을 마치고 다시 해외로 옮기게 되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얘들은 빠르게 적응해요~"


아이들의 보호자인 엄마로서 아이들의 성격과 개인 차에 대한 배려를 못한 채 사람들의 낙천적 경험담에 귀를 열었었다.


겨우 1학년을 마치고 떠났던 작은 아이는 2~5학년 과정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이곳에선 생략된 셈이다. 4개년 과정의 기본 영어가 생략된 서울살이 동안 스튜디오의 녹화대기 중 시간까지도 책 읽기에 빠져 있을 만큼 작은 아이는 영어로 된 책들을 혼자서 꾸준히 읽었다. 부모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동행하여 아이들이 선택한 책을 카드로 결제해주었을 뿐이다. 어린 두 아이를 동네 도서관에 넣어주고, 주말쇼핑을 하곤 했던 시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건너뛰고 6학년 연령으로 돌아온 전학생 후보로 시드니 공립초등학교 교장선생님과의 면접에서 영어구사능력부문을 통과했다. 단번에 랭귀지스쿨 과정 없이 6학년 입학이 허가되었다. 남자교장선생님의 작은 딸에 대한 입학조건은


"댕그렁거리는 줄로 늘어지는 귀걸이는 아이들과 놀다 부딪히거나 넘어져 귀가 찢길 수 있으니 귀에 단추처럼 딱 붙은 귀걸이로 착용해야 해요."


였다.


이후 또래들과 곧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던 작은 딸이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스쿨버스를 타고 귀가하기로 했으니, 3시 40분이면 언덕 위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걸어 내려와 4시에는 집에 돌아왔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IMF 시절'로 불리던 1997년 말 아시아 경제위기 발생 직후이므로, 서울에서 방송에 출연하는 동안에 연락방법으로 허리 벨트에 매달려 문자메시지 발신기 역할을 한 ' 일명 '삐삐' 호출기를 사용했었다.


시드니에서도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한 삐삐도 없이 우리 집은 남편에게만 무전기처럼 크고 묵직한 회사 업무용 핸드폰이 있었다.


1개월 전쯤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주택가로 불리던 동네인, 집에서 가까운 기차역 부근에서 아시아계 여중생 1명이 아침 7시에 집을 나선 등굣길에 바람처럼 실종되었다.


집에서 기차역을 향해 걸어간 모습만 찍혀있고, 그 이후 오리무중으로 방송된 여중생의 부모는 교복 입은 딸의 등굣길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해서 역 앞에 세워두었다. 목격자를 탐문하며 아침 등굣길이던 딸의 이동 동선을 확인하느라,.


딸을 키우는 엄마는 자주 소심해지고 겁이 난다, 힘이 약한 여성을 타깃으로 한 악행의 피해 뉴스가 잦아진 사회에서 특히.


그즈음 실종된 여학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거의 매일 전단이 뿌려지고 뉴스에 다음 상황이 보도되는 중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다고 알려진 그 가족은 실종된 당일의 차림새인 교복을 입힌 마네킹을 사람들의 통행이 번화한 지역 여러 곳에 계속 세우고 온 가족 구성원이 목격자를 찾아 탐문에 나섰다.


교복 입은 여학생의 마네킹이 세워진 지하철역을 지나면서 늘 마음이 아팠다. 그 아픔과 공포를 그 가족들은 어찌 감당할꼬. 부모의 품으로 여학생이 무사히 돌아오길 특히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은 모두 바랬던 터였다. 4년을 지내고 서울로 귀국할 때까지 이후 반가운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로 내 아이의 미도착 상태를 점검하며, 침착하고자 애썼다. 혼자서는 절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평소에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오늘은 피아노 지도교수의 사정으로 인해 피아노 레슨이 뒤로 미루어져서 밤에 가야 하는데... 시속 60km와 80 km 도로를 지나는, 왕복 90분 거리를 운전해서 가야 하는 작은 딸의 피아노 레슨이 밤으로 미루어져, 나는 평상시보다 2시간여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레슨을 위해 출발해야 하는,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스며든 6시가 될 때까지 귀가하지 않은 작은 아이를 기다리면서 내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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