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공포심에 정신이 나간 나는 부리나케 차에 시동을 걸어서 학교를 향해 내달렸다. 쉬지 않고 60km로 달리면 20여 분 걸리는 위치로.
도착해서 교문 바로 앞에 운 좋게(?) 주차를 했다. 평소의 등하교 픽업 시간이라면 학교 앞 주차 자리는 벅적거려서 꿈도 못 꾸지만, 아이들 하교 후에는 오직 고요 그 자체인 거리이니까.
주변은 적막함뿐이고, 학교 교문은 칭칭 동여진 쇠사슬과 열쇠로 잠겨있다. 잠겨진 교문도 처음이고 두 개가 맞물리는 교문을 잠그느라 칭칭 동여매진 쇠사슬은 더욱 낯설었다.
' 내 어린 딸은 어디에?'
이곳은 주로 차로 움직이는 곳으로ㆍ 주택가라 해도 산속에 조성된 마을이어서 워낙 보행인들이 없기도 하려니와, 집도 드문드문 있다. 낮에도 한적하여 어른도 혼자 길을 걷기가 두렵다.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에 당황하여 주변을 돌아보는데, 교문 반대 켠 쪽에서 100여 미터는 족히 떨어져 자리한 첫 번째 단독주택 대문 앞의 어스름 속에서 작게 움직거리는...
내 어린 딸은 얼마나 오래 구부리고 앉은 채 엄마를 기다렸는지 자동차의 불빛을 보고도 한 번에 일어서지 못한다. 달려가는 엄마 앞에 겨우 선 어린아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고.
겁도 많은 아이를 나는 3시간이 다 되도록 잊고, 집에서 내 일을 하면서 태평하게 아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엄마와 자식은 감정이 전달된다는데, 어린아이의 마음이 타들어가는 동안 나는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서 악기 레슨 후 돌아오는 길에 먹일 간식을 준비하고, 저녁거리를 손질하느라...
"왜 스쿨버스를 안 탔어? 도서관에 있다가 놓친 거야?" (드물게 그런 일도 있었으므로)
"엄마가 하교시간에 학교에서 나를 픽업해 준다고 ... 오늘 아침에.""
차가운 몸의 어린 딸은 잔뜩 겁에 질려서 후들거렸다.
"그랬어? 내가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
"지나가는 아줌마가 '이렇게 길에 혼자 있으면 위험하다고 빨리 집에 가라는데 공중전화가 학교안에 있어서엄마랑 연락도 안 되고..."
차가운 아이를 먼저 꼬옥 껴안았다.
"길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이 집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
눈물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딸이 덧붙였다.
"고마운 분이구나."
어린 딸의 부재에 내 등이 얼마나 서늘했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가운 딸의 몸에 둘러줄 외투도 없이 나 자신의 옷차림이 너무 가벼운 채 나왔다.
"엄마가 정신이 나갔나 봐. 미안해 미안해... 얼마나 막막했니?"
"엄마 걱정할 까 봐 안 울라고 했는데, 어두워지는데 엄마가 나 여기 있는 거를 잊어버렸으면 어떡하지? 생각하니까 눈물이 막 흘러서..."
"미안해, 미안해.! 무사해서 고맙고 고마워."
산을 깎아 만든 동네라서 보행자들이 별로 없어 외진 데다가, 집도 드문드문 단독주택 위주인 곳이니 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아시아계 여중생 실종사건에 이어 바로 얼마 전에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서 자기 집을 100여 미터 앞두고 귀가하던 호주 여고생 둘을 자동차로 납치한 사건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용변을 핑계로 2인 납치범의 시선을 따돌리고 순발력 있게 낙엽이 많이 쌓인 곳의 고슴도치 굴을 발견하고 몸을 숨겼다가 새벽녘에 가장 가까운 주택으로 달려가서 구조되었었다.
언어가 편치 않은 데다가 갑자기 머물게 된 외국이라서 두 번째 거주인데도 긴장을 많이 하게 된다. 그즈음 연이은 어린 여자아이 납치 사건들에 놀라서 나는 그 뉴스를 두 딸에게 설명해주며 구조된 여학생의 목숨을 건 지혜를 설명해주었었다.
'국내외 모두 대부분이 좋은 사람들로 구성된 안전한 사회이지만, 우린 외국인이니 언어도 서툴고 쉽게 눈에 띈다.' 고
' 함부로 더구나 여학생이 혼자서 인적 드문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 안전하지 않다'고 강조했었는데, 정작 엄마의 용량에 넘치는 일상과 건망증으로 어린아이를 무책임하게 위험에 처하게 한 거다.
서울과 달리 인구밀도가 낮으니, 번화가가 아닌 이상 한적한 주택가에서는 대낮에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내 집 주변조차도. 오직 승용차들만 빠르게 지나다닐 뿐 길을 걷는 행인이 안보이니 그 적막함이 묵직하게 두려웠었다.
엄마의 부주의로 어린 딸의 불안감이 치솟은 시간을 생각하면 그 딸이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서울살이에서 제일 좋은 점은 밤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아 길거리 보행이 대체로 안전한 점이다. 돌아보면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치안이 안전한 편인 국가의 도시에서조차도 엄마의 부주의는 성장기의 어린아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곤 했다.
*대학원 진학 후 비문 사용 습관을 고치기 위한 글쓰기 연습으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