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못 듣고, 말을 못 한다는 것은
*도라지 (Balloom-Flower, 4.23 탄생화, 꽃말 : 상냥하고 따뜻함, 유순함) (출처: 꽃나무 애기 Band)
내년에 초등학교를 가려면 적어도 올해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의 문해 능력은 생겨야 할 텐데...
주 1회 10주 수업 후 2주 동안 단기방학이다. 3개월마다 한 번씩 1년에 4차례 방학이 있는 이곳의 학제는 이방인에게는 대략 난감했다. 후에는 이 시스템 덕분에 두 서울이들이 뒤쳐진 학교 진도를 복습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에 여간 도움 되는 기간임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만 다섯 살을 향해 자라는 중인 여린 성품의 큰 서울이는 집 앞 유아원을 가는 목. 금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 화요일은 무탈하다가 수요일 즈음이나 목요일 오후부터 열이 오르고 목이 부어 병원을 가게 되는 일이 자주 생겼다. 아기 때부터 편도선이 자주 부어서 급기야 입원하게 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던 큰 서울이인지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열이 39도와 40도를 왕복하니 의료 관련 전공이 아닌 서울이의 엄마로서는 참 난감했다.
간절했던 유아원 등교일인 목요일을 앞둔 수요일 오후부터나, 겨우 하루 다녀온 목요일 밤부터 고열이 나는 큰 서울이를 간호하며 서울이 엄마는 큰서울이가 '언어 습득 기회'를 놓치는 데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서너 달 후에 말을 못 하고 못 듣는 상태로 학교를 다닐 것을 생각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유아원을 가도 시원치 않은 판국에 그 귀한 기회를 병원 다니고 해열 치료를 받느라 결석을 하는 일이 참 답답했다.
아, 서울이 엄마가 큰 서울이의 학교 유치원 입학 후 돌아본 지난 6개월 동안의 서울이 병치레는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낯선 문화, 낯선 나라, 낯선 피부색과 외모의 사람들에 섞여가는 과정에서 반복되던 그시절의 큰서울이의 고열 병치레는 단순한 편도선염이 아니라.... 낯선 곳에 놓인 어린 마음이 감당하느라 그 별난 환경이 편치 않았나 보다. 국내에서 4살까지 성장하는 동안 아기 때부터 낯을 가리지 않고 위층 초등학생 언니들과도 곧잘 놀면서 그 댁 언니네 아빠 무릎에 앉아 밥도 잘 먹는다고 칭찬을 가득 받았던 아이인데....
어린 시절 현지에서 언어를 배우는 꿈같은 기회임에도 어린아이가 적응해가는 과정은 어른들이 쉽게 말하곤 하던
"걱정 말아요, 얘들은 금세 적응하니까"
가 아닌 거였다. 그래서 서울이네 엄마랑 두 서울이 들은 <톰과 제리 Tom and Jerry>나 <토마스 탱크 엔진 Thomas Tank Engine> 등의 만화영화가 시작되는 오후 4시가 되면 처마 밑의 제비처럼 나란히 소파에 앉아 1시간 동안 쥐랑 고양이랑 코끼리, 기차, 오리, 원숭이들이 등장하는 T.V의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열심히 '보고 또 보고' 했다. 그리고 비디오 공테입을 넣어 녹화를 해서 다음날은 아침부터 되돌이해가며 열심히 시청했다. 어느 날 두 서울이의 언어 항아리에 언어를 담은 물이 가득 채워져 넘치기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두 서울이가 1학년 3학년을 마치던 날 5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이들의 나라로 돌아왔다. 겨우 적응되어 이젠 다람쥐처럼 즐겁게 달려 다니며 즐거운 아이들 틈에서 놀만해지니 두 아이는 교육내용이 전혀 다른 서울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시드니에서 보낸 5년의 교육과정 대신 한국에서의 교육과정은 5년과정이 증발된 상태의 사회에서 다시 마음앓이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녹화해 보내주는 ' 딩동댕 유치원'과 '뽀뽀뽀' 프로그램 테이프를 닳아지게 돌리며 서울의 문화를 배워왔지만 현장실습이란 게 있지 않은가? 2살 4살에 떠난 두 서울이 들은 좌충우돌하면서 한동안 마음속에 시름이 내려앉았다. 두 서울이의 아빠는 주말이면 두 아이들을 위해 자주 초코파이나 파운드 케이크 위에 초를 꽂고 불을 켜서 아이들이 소원을 기도하는 미니 티타임을 준비했다.
그렇게 365일 패키지가 4번 지나고 다시 콩나물 뿌리처럼 외국에 두번째로 내려앉은 삶의 손님이 되었다. 손님으로 다시 시작한 이방인의 삶은 문간방에 세든 셋방살이 새댁처럼 늘 눈치가 보인다. 남의 나라.... 언어도 문화도 눈치껏 덮어써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곳에서 서울이네는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아시안(Asian)이다. 한국인이 일본인, 중국인과 다름은 그들에겐 알 바 아니므로. 그런 와중에 IMF덕분에 예전 근무지에 다시 배치된 통에 같은 나라로 벌령이난 두 서울이의 아빠덕분에 시드니에서 두번째의 손님살이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서울이의 엄마는 고단한 입시공부에서 해방된 나이의 성인이어서, 영어를 문법에 어긋나게 사용해도 무방하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린 두 서울이는 4년 동안의 공백기를 지나 뒤늦게 합류한 학습부진아가 되었다. 학습과정을 본적도 배운 적도 없이 교실에 앉혀져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온통 낯선 문화 속에서 숨 쉬고 있었음을 돌아보면... 살아내려 수고로웠을 아이들이 새삼 고맙다. 서울에서는 강남과 강북 학교 전학도 적응 문제로 어려워한다. 지방에서 서울로 또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근 가는 부모와 함께 한 아이들의 경우도 결코 녹녹지 않을 터... 월말고사가 있던 시절에 엄마의 고교 입시를 1년 앞두고 발령 난 부모와 함께 중 3 초입에 옮겨간 도시 학교의 교과진도가 달라서 당황하며 애썼던 경험을 돌아볼진대...
다른 인종의 다른 나라에 인종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 소수민족 어린아이들의 상황은 "애들은 금세 적응해요"로 위로하기에는... 더구나 언어가 달라서 의사소통을 몸짓으로 하는 수준인 경우에는 더더욱... 집안에서 마음껏 쿵쿵 걸어도, 피아노 앞에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두두두' 두드리며 연주해도 눈치 볼 필요가 없는 단독주택에 자리 잡았지만, 타고난 수재가 아닌 두 아이의 얼굴에선 다시 불안한 눈빛이 일렁거렸다.
사실 이들에게 학교 사회나 친지가 포함된 가족들 간의 문화가 자주 새로운 건 자국이나 타국이나 비슷했다. 3세, 5세에 이방인 생활이 시작되면서 집에서만 모국어를 사용하고, 밖에서는 제2 언어의 사용법을 먼저 배운 셈이니까.
일상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말하는 누군가들에게서 좋은 기운을 얻어 돌아오는 날이 천천히 늘어갔다. 그러고 보니 외출 길에 만나 지나치는 인연들의 십중팔구는 미소가 담긴 얼굴들이어서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사람 사는 곳이니 각자의 성격이야 어디나 비슷한 터겠지만...
그날 남편은 3박 4일 출장 중이었다. 6학년과 중학교 2학년인 두 딸과 함께 미니 2층 집에서 바깥이 훤한 시각부터 문단속을 꼼꼼히 하고 밤을 맞이했다. 이곳은 밤이 되면 문자 그대로 칠흑같이 어두워서 누구라도 길에 나서기가 두렵다.
주택가에는 드문드문 가로등이 있다. 아파트 입구나 단독주택 입구에는 집주인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돌계단이나 돌 받침 바닥재 등으로 바닥을 깔은 통로를 밝히느라 낮은 가로등을 양쪽에 세워두는 편이다.
* 한강 (출처: Daum )
밤에도 한강변 다리마다 펼쳐지는 진주 목걸이 같은 아름다운 조명들과 강변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들, 그리고 아파트들의 환한 불빛들이 일상인 한국에서 간 가족에게는 그곳에서의 침침한 가로등이나 간접조명으로 설비된 집안 불빛은 마치 전력난에 시달려서 전기를 아끼고 또 아껴 쓰는 듯한 느낌이 들게 최소한의 조명으로 지낸다. 시드니 유치원에서 설겆이를 퐁퐁과 헹굼 단 2회로 끝나던 부엌 싱크대의 물 사용이 그러했던 것처럼...
땅이 넉넉한 이곳에선 높이 올려 세워진 아파트보다는 잔디밭과 나무들이 서 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이 대세이다. 아름다운 도시이고, 일자리가 넉넉해서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상업도시라고 해도, 시내 복판을 제외하면 워낙 인구밀도가 낮다.
신도시(?) 같은 번화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밤거리에서 인기척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밤에 숲 속의 집으로 가는 길은 자동차의 동그란 접시만 한 헤드라이트가 없으면 문자 그대로 칠흑 같은 산길을 더듬어 집을 찾아가는 형국이어서 좀 아슬하다.
IMF의 경제위기 탓에 다시 같은 도시로 이동하게 된 아빠 덕분에 적응은 훨씬 수월한 셈이다. 이미 지인들이 살고 있으므로.... 엄마랑 두 딸들은 아빠의 부재에 썰렁해진 넓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서툴기 짝이 없는 영어 연습을 위해 TV로 ABC 뉴스를 시청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 달려있던 전등이 줄에 매달린 채 30 cm쯤 늘어져 대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