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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복 키다리 아저씨 'May I help you?'

타인의 삶에 칠해주는 기름

by 윤혜경

시드니의 시간

장면 1


어린이집 개념이 없던 시절 어느 날 큰아이는 학교 유치원에 다니고, 집 앞 유아원 대기 중인 3살 된 작은 아이를 태운 상태로 우체국 바로 앞에 면한 도로의 30분 주차 자리에 차를 세웠다.


아이가 있는 채 승용차를 잠그고 빠르게 우편물을 찾으러 들어가는데 , 뒤에 따라오던 1톤 트럭의 이태리 남자 (외모와 영어 억양으로 어느 정도는 구별이 가능하다)가 자신의 차를 세울 자리가 없자, 별안간 큰 소리로 소릴 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차를 주차하려고 뒤에서 눈여겨보고 있는데, 내가 주차를 해서 자신의 주차자리가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도착 순서대로 주차 중인데...


그냥 상대가 동양인 젊은 아기 엄마이니 목청껏 떠들어 겁을 주어서 차를 빼도록 겁박하자는 시도였나 보다. 차 속에 앉아있던 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포함된 바깥의 소동에 놀라 울기 시작했다.


바로 건너편 백화점 입구에 있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서 모여들었다. 그들은 그 남자를 말렸다. 그리고 내게는 자신들이 증인이 되어줄 테니 저 남자의 차량 번호를 경찰서에 고발하라고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두 블록을 지나 위치한 경찰서로 안내하는 그들을 따라서 가며, 그들의 시간을 허비하게 된 상황에 당황했다. 한글처럼 조리 있게 영어를 구사할 능력도 안되는데...


그렇게 난생처음 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서툰 영어로 말해야 하는 30대 초반의 동양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쓸데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들과 경찰관이 말로 건네준 위로만으로도 그동안 놀라고 상했던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정식 고발의 경우에 집주소가 알려질 수 있고, 외국인이어서 집요한 괴롭힘을 당할 수 있으니 그렇게 불량 불량한 상대와는 부딪치지 않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으며, 고발은 하지 않는 걸로 정리하였다.


키가 웬만한 남자만큼 큰 40대 70대의 그녀들은 기꺼이 witness (목격자) 자격으로 자신들의 연락처를 경찰서 서류에 적어두었다. 혹여 이어질 수도 있는 무뢰한의 도발에 대비해서.


무엇보다도 어린아이가 차에 타고 있는데, 자신의 주차를 위해 무식하게 시비를 걸었다며 나를 위해 내 남편보다도 더 분노했다.


그날 모여들어 아이를 도닥거려주고 내게 도움이 되어준 사람들 덕분에 서툰 영어와 느닷없이 당한 봉변의 불쾌함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장면 2

호주에 입국한 지 채 일 년이 안되어서 집과 유아원 언저리만 눈에 익혔던 시기의 크리스마스 즈음 어스름한 저녁에 지인으로부터 어학연수 중인 조카를 픽업해서 하룻밤 재워 보내 주길 부탁하는 연락을 받았다. 남편 퇴근 후 출발한 어둑한 시간의 여정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다.


물론 여벌 타이어가 뒷 트렁크에 잘 있지만, 벽에 못 하나 박는 일도 난제로 여기는 부부에게 <타이어 바꿔 끼우기>는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자동차보험 회사가 바람처럼 날아와주는 시대가 아니다 보니 남편은 아주 난감하여 차를 길 한쪽에 세우고 트렁크를 열어 세운 채, 생각 머리를 찾는 중이었다.


그때 지나던 승용차가 멈추고 운전석의 문이 열리더니 운전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May I Help You?"


그이는 어둠 속에서도 구별이 될 만큼 단정한 제비꼬리의 검은색 턱시도 차림이었다. 친구 결혼식 전야 파티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이는 자신의 손전등을 가져와서 흙이 펼쳐져 있는 도로 위에서 허리를 굽혀 우리 차의 납작해진 타이어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만류하는 동양인 부부에게


"No Worries~"


를 반복하며 흙바닥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우리 차 아래에 자신의 차에서 가져온 기구를 설치하고 4000cc 승용차의 뒷부분을 들어 올려 타이어를 교체해 주었다.


그의 승용차 안에서는 그의 아내가 파티복 차림으로 조용히 기다렸다. 거의 40여분 동안 혼자서 동양인 가족의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해주느라 땀을 뻘뻘 흘린 그 신사는 민망하고 고마움에 허리도 못 펴는 남편과 나의 감사 인사에


"My Pleasure"


로 답하고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이미 약속시간에 늦었을 그들이 떠날 때까지 허리 굽혀 인사하다가 명함을 주고받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타인의 삶에 칠해주는 기름은 무릎담요처럼 구성원의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사회를 따스하게 덥혀준다. 낯선 사회에서 터무니없이 큰 가슴의 도움들을 받으며 나도 최선을 다해서 누군가에게 큰 가슴이 되도록 노력하기로...


이후 아주 작은 실천으로 <지하철 역사에서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선의 제공하기>를 실행 중이다, 우체국 직원처럼 집까지 안내는 어렵지만 묻는 이의 갈증이 해결되도록 안내한다. 이방인에게 베풀었던 그들의 특별한 수고로움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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