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우렁각시 06화

서점의 플래티늄 고객, 엄마의 플래티늄 고객

읽거나 꽂아두거나

by 윤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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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나네 사랑초 (꽃말 '당신과 함께', '당신을 끝까지 지켜줄게요')



큰누나 집의 하루하루는 여린 연보랏빛 꽃잎의 사랑초를 닮았다.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거나 하이얀 백합처럼 우아하진 않아도, 여리디 여린 연보랏빛 작은 꽃을 피워내곤 금세 볼품없이 시들어 눕지만, 일 년 내내 꽃자루가 돌아가며 조그마한 꽃을 피워 올려 소소한 기쁨을 건네주는 사랑초...


오늘 큰누나네 오후 세 시의 티타임 식탁 위에는 누나 아빠가 세팅한 따끈한 전지분유와 보드라운 달걀 머핀이 간식으로 차려져 있다. 그리고 누나 아빠에게서 엄마와 큰누나를 향한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가엾은 사람들)' 시대의 프랑스 사람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엄마랑 누나는 아빠가 소개하는 역사 귀퉁이의 일상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누나 아빠는 퇴직 후 서재의 책꽂이에 장식된 책들을 하나 둘 빼들었다가 어느덧 책 읽기가 진짜 취미가 되었다. 특히 역사소설 읽기... 책 읽기를 취미로 삼은 아빠는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서 연대별로 세계사를 잘 정리하는 편이다.


반면에 큰누나는 대학 입학을 준비하느라 열심히 읽어두었던 국사에 강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시리즈는 출간될 때마다 누나 엄마가 세계사가 약한 누나들을 위해 즉시 구매하곤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한국 역사에 대한 무지한 망언 이후 자칫 책이 누나네 서가에서 쫓겨날 뻔했다가 간신히 귀퉁이로 밀려나는 걸로 정리되었었다. 아직 누나들이 읽지 못했으므로...


사실 누나 엄마는 로마인 이야기를 제2권도 못 읽었다. 누나네 엄마는 책을 손에 들고 짬짬이 만화를 보듯이 읽는다. 늘 소소한 할 일이 눈에 들어오곤 하는 누나 엄마의 바람직하지 않은 '쉬는 시간 활용법'이다. 책을 읽다가 바닥에 먼지가 눈에 뜨이면 밀걸레를 들고 와서 닦아내고 걸레를 깨끗이 세탁해서 한쪽에 세우고 돌아서면, 식탁 위의 얼룩이 눈에 띄어 퐁퐁을 풀어서 닦아내고 헹구고, 서너 번을 말갛게 식탁 위를 닦아내고 뒤처리를 하는 동안 엄마손에 있던 책은 식탁 귀퉁이에 엎드려 있다.


전문 주부 역할을 하던 엄마의 본의 아닌 은퇴 뒤에 아르바이트생처럼 물려받은 아빠는 영락없는 일일 취업자 자세로 부엌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제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생 주부 역할이다. 한 손에는 책을, 한 손에는 하루 2끼 식사 준비를 얹어놓은 아빠 주부 스타일상 여전히 엄마의 손을 필요로 하는 구석구석이 참 많다. '로마인...'시리즈는 그 구석진 칸에 계속 꽂혀 있을 테고... 아직 읽을 것이 많은 누나 엄마의 손에 지속적으로 선택되기는 한참 멀어 보인다.


아마도 누나 엄마에게는 내용 연결이 잘 안될터... 아직 앞부분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걸 보면 매번 처음부터 다시 보는지도... 여직 두 권 째를 못 끝냈다. 누나 아빠는 꼼꼼하게 15권에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까지 16권을 쉬지 않고 단번에 읽었었다, 마치 식탐 쟁이처럼. 제랄드 메사디에의 '신이 된 남자' 6권+1권과 '베르베르 베르나르'의 '신' 시리즈, '개미' 시리즈 5권도 선택 구매는 누나 엄마가 했었고, 아빠는 집에서 끝까지 그 책을 다 읽었었다. 최인호 작가의 '지구인' 시리즈도... 오래전 일이다. 큰누나가 수술실에 눕기 전이니...


이번에 엄마가 구매한 '심판'도 역시 아빠가 먼저 읽었다. 이번엔 엄마의 '심판' 읽기가 성공하려나? 오호, 오늘 누나 엄마는 스탠리 코렌의 '개는 어떻게 말하는가?'를 손에 들고 다녔다. 이건 개의 눈빛과 몸짓을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전공의 일부이니 즉시 도움이 되는 내용일 게다. 아마도 공부일지도...


누나들이 책에 눈을 맞추기 시작할 때부터 광화문 나들이를 하기 시작한 큰누나네는 책이 장식용처럼 많다. 책을 열심히 구매하는 습관의 누나 엄마는 K 서점의 '플래티늄(Platinum) 고객'이고, 아빠는 책을 끝까지 못 읽는 누나 엄마의 '플래티늄 고객'이다. '궁둥이 근육 상실을 늦추려면 좀 걸으라'는 엄마의 지적질에도 육순의 아빠는 꿋꿋하게 책만 읽는다. 담배와 책, 그리고 커피는 아빠의 생필품이다.


누나네 엄마의 단기 목표는 병약한 큰누나의 건강 회복이다.


"딸아, 건강하자!!!"


엄마의 소원을 학교 축제 참가팀이 캘리그래피로 써준 것을 받아다가 두 사람이 누워 자는 침대 벽에 붙여놓았다. 마음속으로 날마다 주문을 외우는 누나 엄마는 성인병을 품고 사는 아빠까지 몸져누울까 봐 좀 예민하다. 누나네 엄마는 "당신까지 아프면 내 인생은 폭망이야" 하며, 협박도 일삼는다. 그 정도의 협박쯤이야 누나 아빠의 귓바퀴에 닿자마자 즉시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지만...


그렇게 큰누나네 집은 서점의 플래티늄 고객과 그 고객의 플래티늄 고객이 함께 지내며 큰누나의 건강 회복을 목표로 연보랏빛 사랑초 꽃잎처럼 야리야리한 손톱만큼의 즐거움을 찾는 일상이 이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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