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우렁각시 05화

예쁜 살구 빛깔의 악취와 친해지기

약이 될지 독이 될지

by 윤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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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진 영랑생가 은행나무 - Daum 카페



큰누나가 아프기 전에는 누나네 가족은 은행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매년 크기별로 단풍잎과 함께 아기 은행잎부터 어른 은행잎까지 책 사이에 끼워말려 가족들 사진과 함께 책갈피를 만드는 게 다였다.


사실 온통 살구빛 폭탄처럼 떨어지는 은행의 계절이 오면 악취를 피하기 위해 찡그린 얼굴로 구두 신은 발을 이리저리 옮겨 딛으며, 그게 고명으로 고기와 함께 꿰어져 나오는 쫀득한 식감의 초록빛 은행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지조차 모를 만큼 무심했다.


엄마와 누나가 아는 초록 열매 은행은 식당에서 갈비찜 위에 고명으로, 아님 쇠고기와 번갈아 꿰어져 나오는 한정식의 정성스러운 사이드 접시쯤으로 인식하는 게 전부일 게다.


호감 만점인 초록빛 은행과 혐오 만점인 살구빛 은행과의 거리는 적어도 은행열매에 무지한 엄마와 누나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아, 큰누나가 3살 즈음에 야뇨증에 도움이 된다며 누나의 할아버지께서 은행을 얻어오셨다. 이미 솜씨 좋으신 할머니의 손길로 손질이 다 되어있는 보드라운 은행이라 엄마는 할머니 말씀대로 프라이팬에 초록 빛깔로 윤기 나게 구워서 큰누나에게 3~4알씩 2주쯤 먹인 적이 있다.


그리고 평소에 초록빛의 윤기 나는 은행은 한정식 코스에서 요리 위에 정갈하게 앉아있는 눈요기 재료쯤으로 간주되었다.


만으로 서른 살 한국 나이로 서른두 살 큰누나의 신장이 아프다, 많이. 그리고 방광도, 심장도, 뇌도, 신경도...


숱이 유난히 많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누나의 탐스러운 머리칼이 면역저하 치료를 받으면서 부스스해지며 심하게 빠지기 시작했다. 샤워실은 말할 것도 없고, 누나가 세수만 해도 두어 달이면 안방 세면대를 막아서 뚫어뻥 기사가 방문하게 한다. 누나네 엄마는 뚫어뻥 기사가 세면대 아래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제 세면대를 뚫는 방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잡혀 나오고,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에 겁을 내는 큰누나를 보며 누나와 머리칼 색상이 비슷한 엄마는 머리를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네 머리가 많이 가벼워지면 엄마 머리칼로 가발 만들자. 우리가 같이 쓰면 되지" 했다. 누나 엄마는 가발을 위해 기르기 시작한 머릿결에 윤기를 주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인터넷의 정보대로 마요네즈 달걀팩을 머리카락 위에 시도했다. 인터넷은 정말 편리하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일상생활지혜가 다 담겨있다.


엄마는 "컴퓨터는 정말 신기해"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와 관련해서는 오직 누나를 치료하고 있는 병원의 처방만 따른다. 주변의 많은 조언은 조언으로만. 초록빛 은행 3~4알 섭취만 빼고. 은행도 주 3~4회 정도로 제공하며 누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위약 효과를 기대할 뿐.


누나의 의식소실이 이어지던 시기에 병원 응급실 건너편에 걸려있는 암환자를 위한 웃음치료 베너광고를 보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집에서 20분 거리의 여성발전센터의 웃음치료 프로그램에 누나와 함께 등록했다.


웃음치료...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일부러 웃음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

아주 생소했다.

주차장 사정이 좋지 않아 아빠의 차를 타고 누나와 엄마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치료를 처음 다녀오던 날 눈이 많이 내리고, 엄마는 그 눈밭에 짙은 갈색으로 드문드문 박혀있는 은행을 발견했다.


그날 인터넷으로 신장과 방광, 그리고 은행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어두운 회 밤색 외피의 은행 몇 알이 한겨울에 누나네 집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엄마가 눈밭 사이로 드문드문 내민 은행을 엎드려 주우면, 주변을 청소하던 아저씨는 영문을 모르고


"은행은 가을에 무척 많은데... 길을 쓸면 온통 은행알인데... 지금은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했다.


그렇게 귀하게 주워모은 은행은 살구빛 외종 피가 이미 굳어있다. 겨울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던 까닭에 굳어진 외종 피는 악취가 거의 없다. 고무장갑 낀 손가락으로 외종 피를 힘 있게 눌러 밀어내면 쉽게 벗겨지고, 그 속의 단단한 밝은 갈색 껍질은 수분에 불어있다. 물에 담가 남은 외피들을 씻어낸 후 겨울바람에 2~3일 건조한다. 엄마는 음식 관련하여 아는 게 많은 친구의 조언대로 속껍질 째 냉동실에 보관하였다. 물론 큰누나와 아빠는 집안에서 나는 은행의 거북한 냄새에 잠시 당황했지만, 우울한 엄마가 한겨울에 은행을 주워서 힘들게 손질하여 말리는 일에 점점 동참하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엄마가 눈으로 뒤덮인 아파트 내의 숲 속으로 은행을 찾으러 가는 날이면 큰누나는 두꺼운 옷을 갖춰 입고 엄마와 동행하여 엄마 옆에 서 있어 주었다. 겨울철에는 은행을 발로 직접 밟지만 않으면 악취가 풍기지 않으니까. 겨울바람 속에 서있는 누나는 손과 발이 시립고, 하얀 눈밑의 낙엽 사이로 회 밤색 외종 피의 은행을 찾아내어 비닐봉지에 모으는 엄마는 등에 땀이 난다.


이듬해에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우수수 떨어지는 냄새 강한 살구빛의 은행을 주웠다. 고무장갑을 끼고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서 악취의 범인인 살구색 구성체를 벗겨내고 물로 잘 씻어 잔여물까지 제거하면 물에 젖은 내피의 은행이 남는다. 촉촉해진 내피의 은행은 연한 갈색 속껍질째 알갱이를 서너 날에 걸쳐 건조한 후 냉동실에 넣어두면 일 년 동안 약처럼 먹을 수 있다. 한 달 먹을 분량은 얼리기 전에 속 껍질을 손으로 누르는 '마늘 으깨기'를 이용해서 하나씩 까낸다. 알레르기가 생기기 쉬워서 은행은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하므로 손의 움직임이 둔해지기는 한다.


힘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은행이 쪼개져서 예쁘지 않게 까진다. 살짝 힘을 주어 누르면 내피가 일부 열린다. 손가락으로 더 열어서 쪼갠 뒤 보드라운 속 알갱이를 조심해서 꺼내면 된다. 그렇게 모아서 냉동실에 저장하면 필요할 때 편리하게 조리할 수 있다. 고칼슘혈증으로 간과 심장, 신장에 어려움이 있다 하니 소심해진 엄마는 3~4알씩 연한 올리브유에 예쁜 초록으로 볶아 누나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쌉싸래하고 낯설기만 한 은행 맛을 큰누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근래에는 은행을 주울 시간은 내지 못한다. 대신 묵은 은행을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어 식힌 다음 마늘 으깨기로 깨뜨려 볶아준다. 예쁜 초록은 묵은 은행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고맙게도 간신히 초록을 유지하고 있다.


큰누나네는 이제 은행나무의 팬이다. 공기를 맑게 정화시켜주는 데에 은행나무만 한 게 없다는 정보를 확인한 뒤에는 더더욱 그렇다. 길거리를 수북하게 덮은 노오란 은행잎뿐만 아니라 악취를 품은 살구빛 은행도 이제는 반갑고 예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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