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여전히 여름이고 저는 아직도 꿈속입니다.
다행히 행거는 무너지지 않은 채였다. 다만 한쪽이 또 내려앉은 걸 보니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머리로는 사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들만 잔뜩 결제하고 있다. 일하러 갔다가 손에 쥐여준 추석 선물 세트를 나도 하나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 다른 쪽에는 손잡이가 달린 까마귀 모양 쿠키를 팔에 걸고 있다.
나서는 길, 과일 가게에서 샤인 머스캣을 한 상자 만 원에 팔고 있길래 돌아올 때 한 상자 사야지 마음먹었는데 일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과일 가게는 문을 닫았겠지 그럼 저녁은 무얼 먹을지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과일 가게는 아직 불이 켜진 채 과일 상자들을 가게 안으로 한참 들이는 중이다. 분주한 등에 대고 혹시 지금 살 수 있을까요, 샤인 머스캣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팔천 원에 가져가라며 상자 대신 손잡이가 달린 비닐에 옮겨 담아주신다. 양손 가득 주렁주렁 짐을 든 나를 보고 과일을 비닐에 담아주는 마음, 카페에서 이제 화장실 청소를 할 건데 혹시 사용할 거냐고 물어봐 주는 마음 그런 작은 것들이 크게 느껴진 오늘이었다.
한층 더 양손의 짐이 주렁주렁 된 채로 여전히 더운 밤거리를 걷다 강아지를 달랑 안아 들고 가는 사람들을 본다. 평화로운 표정의 강아지를 보며 나도 집에 있는 고양이가 보고 싶어 걸음이 빨라진다. 이렇게 하나씩 나열해 보면 나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다. 아까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달리다 넘어져 맨살이 아스팔트에 대차게 쓸린 누군가도 그걸 제외하고는 즐거운 일만 가득했기를 괜히 바라본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밤이고 낮에 나가 있는 사이 해야 할 일이 가득 도착했다. 쌍둥이처럼 어째서 모든 일들은 동시에 들어오고 또 동시에 사라지는 걸까, 어제 마치 진공의 시간처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이상하다 이상하다 분명히 바쁠 시간인데, 생각하며 몇 번이나 메일을 확인하다가 여유가 있을 때 걸어두자며 밤 산책에 나서길 잘했다. 누군가가 좋다고 한 음악을 틀었다가 단번에 90년대 한가운데의 어떤 기억들이 쏟아지듯 떠올랐고(사실은 2010년대의 기억들이) 오늘 기다렸다는 듯 그때의 이야기들을 나눈 것도, 예상치 못한 반가운 얼굴을 만난 것도, 좋은 향기가 난 것도 모두 작은 조각의 즐거움이었고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제부터 또 일을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이 즐거운 듯 기묘한, 9월인데도 여름의 한가운데 같은 33도 서울특별시의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