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맞이

by 백현진

저녁을 먹고 나자 조금 걷고 싶어졌다. 마침 스킨도, 빨간 매니큐어도 떨어져 산책 삼아 그걸 사러 가면 되겠다 싶었다. 저녁 8시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짧은 소매 티셔츠와 짧은 바지 차림이 꽤 산뜻하다. 밤산책은 조금 괜찮은지도 모를 계절이 되었다. 플랫슈즈로 바꿔 신은 발이 가벼웠다. 오늘 수업에는 굽이 높은 부츠를 신었다. 그냥 바지가 길어서 자꾸만 밟히길래 별생각 없이 신은 건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쩐지 내 부츠에 시선이 집중되어 조금 난처했다.

앞이 갈라진 스플릿 토 디자인이 낯설어서 나오는 감탄인지 그 외의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나로는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학교에는 늘 맨얼굴로 간다. 머리는 그냥 말린 그대로 풀거나 더우면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꽉 묶어버린다. 옷은 결코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그런 담담하고 수더분한 사람이기 스플릿 토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잠시,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생각하다가 뭐라고 생각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아직 무더워 다리를 감싼 긴 바지도 발목까지 올라오는 부츠도 다소 지치는 기분이었다. 세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맨다리에 닿는 바람이 가볍다.

스킨을 고르고 매니큐어 매대를 찾았는데 빨간 매니큐어는 없었다. 지금 매니큐어가 다 벗겨져 몹시 엉망인 상태라 집에 돌아가 손톱을 매끈히 정리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다른 색이라도 골라 볼까 했지만 내게 빨간 매니큐어가 아닌 다른 선택지는 너무나 어렵다. 결국 스킨만 들고 무인 계산대에 한 줄서기를 하고 있는데 키도 덩치도 매우 커다란 두 사람이 한 줄서기 하고 있는 나를 무시하고 계산대로 들어가 먼저 끝난 계산대를 차지하고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은 걸까? 그렇다고 해도 요즘은 한 줄서기를 하지 않는 곳이 없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비집고 들어 간다고.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제지할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 줄 선 나를 무시하고 계산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게를 나와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 엉망인 손톱을 해결하고 싶다. 화장품 매장에 들어갔더니 무슨 일인지 놀라울 정도로 붐비고 있었고 겨우 구석에서 찾아낸 매니큐어 매대는 매니큐어 매대인 걸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직원은 계산대 앞에서 소란스런 줄서기를 정리하느라 큰 소리를 내고 있고 곳곳의 매대는 텅텅 비어 있다. 조금 더 멀리까지 나가볼까 싶었으나 그럼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결국 매니큐어는 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술에 취한 누군가가 산책 나온 강아지에게 웃는 얼굴로 달려들고 있다. 주인은 난처한 얼굴로 강아지가 짖는다며 피하려 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를 보고는 짖지 않는다며 비킬 생각이 없다. 집에 돌아왔더니 어쩐지 몹시 허기가 져 초코 케이크를 잘라 그릭 요거트와 먹었다. 이상하다. 이상한 날이다.

엉망의 손톱으로 맞이 하는 기묘한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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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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