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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추락(J.M.쿳시)

by 나즌아빠 Jan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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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변화를 접하는 지식인의 자기 고백 (J. M. 쿳시의 ‘추락’을 읽고)


J.M. 쿳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추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1994년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통해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탄생시킨 해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흑인들이 해방된 해이지요. 사회적 변화로 혼란과 갈등, 기득권 세력이었던 백인들의 불안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추락’은 백인 지식인의 모순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크게 3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데이비드 루니의 제자 성폭행 사건, 딸 루시가 괴한들로부터 성폭행당하는 사건, 그리고 마지막 루니의 선택입니다. 살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루니는 나이 든 대학교수입니다. 교수답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자기 방어에 뛰어난 언변가이기도 하지요. 딸 같은 제자 멜라니를 성폭행하고서도 ‘욕망의 권리’라고 하거나 ‘본능에 따르는 것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을 수긍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괴변입니다. 제자를 제자로 보지 않고 멜라니가 출석하지 않은 수업을 출석으로 허위 작성했으니까요. 자기 확신(타인이 보기엔 자기기만)에 빠져 반성이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여성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 인한 실패도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방적 자기 합리화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논리와 말주변에 깜빡 설득당할 뻔했습니다.


그들 모두로 인해, 풍부해졌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도, 실패로 인해서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슴에 피는 한 송이 꽃처럼. 그의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친다. (270쪽)


이런 루니에게 자신의 딸 루시가 괴한 3명에게 성폭행당하고 임신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루니는 괴한 중 가장 어린 1명을 알게 되고 그 애를 발로 아주 세게 찹니다. 루니 자신도 야만적이라고 말한 행동이지요. 자신의 성폭행은 유려한 말로 합리화하면서 딸의 성폭행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대응합니다. 아버지로서의 분노는 이해되지만 제자 멜라니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모순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딸 루시의 선택이 주목됩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임신한 아이를 낳고 심지어 안전을 위해 자기 농장일을 돕던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흑백정권이 교체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살아가는 백인의 처지에 대한 은유로 읽힙니다.


그 애는 여기에 살고 있고 한 줌의 연기처럼 사라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 애는 하나의 현실이에요.


저는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요. (291쪽)


루니는 딸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적잖이 놀랍니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고 단순히 신변의 안전을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니는 이 두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느꼈을까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용서, 참회 혹은 교훈을 얻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멜라니 가족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234쪽)


이제 루니가 취하는 태도는 무엇일까요? 작가 쿳시는 ‘단념’(308쪽)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반성이나 참회가 아니라 ‘단념’입니다. 자기 앞의 상황을 받아들임을 택하는 것이지요.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변화되는 시대와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하는 지식인의 또 다른 솔직한 마음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시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보라는 말에 이렇게 답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나한테는 너무 늦은 것 같구나. 나는 형기를 채우고 있는 늙은 죄수일 뿐이다. 하지만 넌 그렇게 하거라. (303쪽)


‘추락’은 옮긴이가 쿳시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적 상황 변화로 찾아온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불안함에서 탄생한 소설입니다. 시대적 상황에서 소설의 역할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 태도에 대한 글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그래서 여운이 남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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