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식구의 탄생>
그날 이후 정민은 투명인간 셰프가 선사하는 식단의 축복을 받으며 그와 매일 쪽지를 주고 받았다. 사실 며칠 전 주인아저씨는 워낙 문이 오래되어 도어락을 다는 데 이삼일이 걸릴 것 같으니 다른 방을 임시로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정민은 거절했다. 이제는 방에 아무도 몰래 들어오지 않으니 굳이 도어락이 필요 없을 것 같다고 거짓말을 쳤다. 주인아저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 그래도, 정말 괜찮겠니? 열쇠구멍이 낡기도 해서 언젠간 바꾸긴 해야 할텐데...
- 걱정마세요. 계속 열쇠만 써서 그런가. 열쇠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아요
정민은 셰프가 주는 음식과 온기와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집에 가면 정민을 기다리는 만찬과 말동무가 있었다.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뻑뻑한 열쇠 구멍과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민은 앞으로도 셰프가 마음껏 정민의 집에 침입하고 정민을 위로하도록 허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정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김새, 어떤 표정, 어떤 몸가짐을 가지고 있을까.
더 알고 싶었고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경찰의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도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 우리집에 몰래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도망가는 사람을 잡아주세요- 게다가 자칫하면 주거침입죄 따위의 무시무시한 범죄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민은 생각을 바꿨다.
직접 셰프를 찾기로 한 것이다.
셰프를 찾기 위해서는 단서가 필요했다. 셰프는 정민이 던진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지만 대답을 하기가 애매하거나 본인의 정체가 드러날 것 같다 싶으면 입을 닫았다. 예를 들어서,
<말하기 조금 민망하지만, 난 간장으로 한 음식이 제일 좋더라고요>
<좋아요. 간장 양념을 많이 써볼게요>
<근데 돈 많아요? 왜 맨날 이렇게 밥 해줘요?>
<싹싹 비운 빈 그릇을 보고 싶어서요.>
<빈 그릇은 매일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돈이 이렇게 많다면 그냥 빈그릇을 사세요>
돈이 많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며칠을 기다려도 답변은 없었고 정민은 수중에 가진 돈을 전부 털어 꼬깃한 만원짜리 다섯 장을 쪽지 옆에 두었다. 그러나 셰프는 다음날 - <돈은 필요 없어요, 맛있게 먹기만 해줘요> - 또 정민의 속을 터지게 하는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이 외에도,
<왜 나에요? 왜 우리집이냐고요.>
답이 없었다.
<얼굴 좀 봅시다. 지금까지 일 다 눈감아 줄테 니까 얼굴 좀 보여줘요.>
또 감감무소식.
<나 좋아해요?>
<그런 셈이죠>
-어이없어 진짜- 정민은 발그레한 볼을 하고 쪽지에다 톡 쏘아 부쳤다.
오늘도 셰프가 차려준 식사를 정신없이 해치우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정민은 쪽지를 썼다. 셰프가 다소 과도한 큰 손인 탓에 정민은 항상 넉넉한 양의 반찬들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미안했던 정민은 음식 양을 줄여달라는 쪽지를 남겼다.
<셰프, 이건 절대 1인분이 아니에요. 양을 줄여줘요. 괜히 남기고 싶지 않아요ㅠ>
하지만 다음날 셰프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처럼 오히려 정민에게 물었다.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예요?>
-못살아 정말- 정민은 고개를 저었다. 문득 정민의 머릿속에 아빠의 계란지단이 떠올랐다. 그는 설날이 되면 떡국에 항상 계란지단을 담뿍 올려 주었다. 계란지단이 보기에 좋은 건 아니었다. 길이는 제각각이었고, 흰자로 부친 지단은 너무 과하게 익힌 나머지 군데군데 갈색 옹이가 있었다. 두께도 울퉁불퉁하여 다 썰어놓은 모양은 칼국수면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끈따끈한 지단을 옆에서 하나씩 집어먹던 그때 그 맛의 중독성을 따라올 게 없었다. 하나 둘 몰래 집어먹다 보면 떡국에 올릴 지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뿌듯한듯 허허 웃으며 계란 몇 개를 집어다가 껍질을 깼다. 그 계란지단은 스펀지 식감의 편의점 도시락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두툼함과 고소함을 자랑했다. 정민에게 계란이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은 그의 투박하고 고슬고슬한 계란 지단이었다. 그게 너무도 그리워 정민은 홀린듯 쪽지를 썼다.
<아빠가 만든 계란 지단이 먹고 싶어요. 투박하고 두껍고 못생겼는데 계속 손이 가는 계란지단 있잖아요. 들기름 냄새가 나고, 군데군데에 기포가 있고, 식기 전에 잘라서 절단면도 울퉁불퉁해요.>
다음날, 셰프는 정민의 식탁에 계란지단을 듬뿍 올린 떡만두국과 두툼한 계란말이, 그리고 쪽지 하나를 놓고 사라졌다. 고명으로 올라간 계란지단은 정갈하고 반듯했다. 계란말이도 치자빛 비단을 개어 놓은 듯 차분히 말려 있었다.
<미안해요, 노력했지만 그렇게 만들 수 없었어요.>
-괜찮아요- 정민은 작게 미소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겉으로는 별로여도 속으로는 진국인 걸 아는 것도, 못난 것을 참는 것도 정민의 아빠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말했다.
- 중요한 건 ‘그래 보인다’는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정민은 철썩같이 그 말을 믿었다. 나는 손재주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고,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꽤 오랜 시간 스스로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었었고, 주문에 걸린 시간 동안은 힘든지도 모르고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었다.
그렇게 셰프와 쪽지를 주고받기 일주일쯤 지났을까. 셰프는 실수인지 아닌지 자신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흘리고 말았다. 정민은 그 보물같은 쪽지를 손에 쥐고 홀로 중얼거렸다. - 살이 안 찌는 체질인 것 같다고? 내가?
<셰프님 덕인지 때문인지 내가 요즘 살이 찌고 있어요. 책임 져요.>
<워낙 말랐잖아요. 살 안찌는 체질인 것 같은데. 많이 드세요.>
셰프는 정민을 왜 마른 체형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정민은 살집이 꽤 있는 체형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유전적으로 살이 잘 붙기도 했지만 주로는 최소 하루 세끼는 꼬박꼬박 챙겨주던 그녀의 아버지 덕이 컸다. 정민이 식욕을 잃고 살도 급격히 빠진 건 이년 전 화락맨션에 입주한 뒤부터였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좁혀진다. 정민을 마른 체질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민의 최근 모습만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만난 사람들을 의심하기엔 그들이 정민의 집을 알 턱이 없다. 그렇다면 셰프는 화락맨션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었다. 정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 셰프가 화락맨션 사람이라고? 이 우울하고 외롭고 암담한 화락맨션 사람?
*
정민이 윗층의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주먹다짐 사건이 있고 십일 정도 지난 뒤였다. 그는 저녁부터 새벽 서너시까지는 배달을, 남는 새벽 시간에는 새벽배송 일을 하고 아침이 되서야 돌아왔다. 퇴근길에는 습식사료를 사서 화락맨션 마당에 터를 잡은 고양이 페라리의 아침을 챙기곤 했다.
오늘도 그는 화락맨션 앞마당 한켠에서 습식사료를 와구와구 먹어 치우는 페라리를 보며 캣대디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잔뜩 충격을 먹은 듯한 정민의 얼굴 때문에 요며칠 마음이 불편했다. 매일 밤 함께 화락맨션을 나섰던 정민이 편의점 야간 알바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며 일을 하는 고충이 어떤 것일지를 아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민에게 겁을 주고 피해를 주었으니 그는 어서 사과를 하고 싶었다.
끼익-
화락맨션의 시그니처인 녹슨 철문이 열렸고, 마침 퇴근을 한 정민이 들어왔다. 그는 앞마당에서 자신을 보고 재빨리 눈을 피하는 정민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저기요, 저, 미안합니다. 그날 편의점 앞에서 그 이상한 아저씨랑 치고 박고 한거요
그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정민은 놀라 주변을 살폈다. 사과를 받을 사람은 정민밖에 없었다. 정민은 애써 덤덤한 척하며 말했다. -뭐, 사정이 있었겠죠.- 시퍼런 멍과 상처딱지가 그의 얼굴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정민은 그날 유혈이 낭자했던 얼굴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는 뒤돌아선 정민에게 급작스럽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 데미안이 뭔지 알아요?
- 네?
- 데미안이요
- 뭐 대충은…
- 알아요?
- 어디에선가 들어본 것 같아요. 제목 정도는...
<데미안>을 안다는 정민의 대답에 그는 당황한 듯 물었다.
- 그쪽은 한 달에 책 몇 권이나 읽습니까?
- 뭐... 거의 안 읽죠
- 그죠? 그놈의 영감탱이 잘난척은 아우
그는 정민의 대답에 그새 얼굴이 밝아져 맞장구를 쳤다. 그 엉뚱한 남자의 이름은 철훈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철훈은 주먹다짐을 한 그날 저녁, 여자친구-이제는 전 여자친구가 되어버린- 혜미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했다. 스물다섯의 대학생이었던 혜미는 학교 앞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카페에 철훈은 항상 아침마다 과일을 날라줬는데 선이 굵직한 외모와 큰 키에 반한 혜미가 철훈의 번호를 물어보며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이었다.
혜미와 데이트를 하다 우연히 나온 '결혼은 오빠와 하고 싶다'는 농담섞인 말에 철훈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에 진심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빨리 남편을 만들고 싶었던 건 혜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날 철훈은 장롱에 고이 모셔둔 양복도 꺼내입고 혜미의 아버지를 찾아가 결혼 허락을 받아내려고 한 것이었다.
- 나 진짜 요 몇 년 동안 바퀴 터지도록 배달만 했어요. 주인아저씨가 깎아준 월세도 꼬박꼬박 저금해서 돈도 꽤 모았다 이겁니다. 근데 걔 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평소에 생각을 얼마나 하고 사냐고. 딱 대답했어요. 제 머릿속에는 혜미랑 결혼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 양반이 허허 웃더니 평소에 책을 얼마나 읽냐고 하더라고요. 안 읽는다 했죠. 안 읽는걸 뭐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혜미의 아버지는 <데미안>이라는 책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던 것이다. - 인간이란 자고로 성장이 필요하고, 자네도 싱클레어와 같은 처지인 것으로 사료되네만, 가차운 곳에 데미안같은 선구자가 주는 인생의 교훈을 배우고 따라서 성숙해져야... - 퇴근 후 단 일분도 쉬지 못한 채 곧장 그를 찾아간 상황에서 알지도 못하는 책에 대한 일장연설을 듣게 되자 철훈은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그만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이보게나 자네!- 곤히 잠든 철훈을 발견하고 그는 버럭 화를 냈다. 결국 그는 <데미안>을 읽어오지 않으면 결혼 생각은 꿈에도 말라며 철훈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 눈이 훼까닥 돌았죠. 내가 그걸 왜 읽습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뛰쳐 나왔어요. 책이랑 안 친하고, 가방끈 좀 짧고, 집안 별 볼일 없고, 배달부 노릇 한다고 사위 될 자격 없다 이 뜻 아닙니까. 그래서 그날 혜미랑 대판 싸웠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책을 좀 읽으란 뜻 아니에요?
-그게 나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철훈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한숨을 푹 쉬었다. 페라리는 어느샌가 사료 한 캔을 뚝딱하고 앞발로 입주변을 그루밍했다. 정민은 철훈은 눈치를 보며 페라리가 작은 혀로 싹싹 핥고 있는 그릇만을 어색하게 쳐다봤다. 철훈은 디저트로 주머니에서 츄르를 꺼내 페라리의 밥그릇에 익숙하게 짜 넣으며 말했다.
- 그날 이후로 혜미가 책 좀 읽으라고 날 계속 못살게 굴더라고요. 자기랑 결혼하기 싫은 거냐면서. 내가 안 읽겠다고 버티니까 결국 어제 차였습니다. 진짜 이게 헤어질 이유가 됩니까? 나 참 일이 꼬일라니까, 뭐같이 꼬인거죠
-음...
-물론, 결혼 얘기가 성급했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럼 차라리 너무 빠른 것 같다, 시간을 좀 가지자,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사귄지 얼마나 됐는데요?
-삼개월이요
-짧긴 하네요
-사랑으로 극복해보려고 했어요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뭐, 나는 이제껏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데요
- 진짜 한번도요?
- 노코멘트
정민의 대답에 피식 웃은 철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아무튼, 그날은 진짜 재수가 없었던 날이에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런 싸움도 태어나서 처음 해봐요.
- 에이 거짓말
- 저기요, 나도 내가 양아치처럼 생긴 건 아는데, 나 학교 다닐 땐 나름 모범생이었어요
- 뭐.. 믿어줄게요. 근데 왜 페라리에요? 페라리가 검은 차로 유명한가?
- 아뇨, 페라리처럼 귀한 놈이니까요
사료 한 캔을 비웠는데도 또 정신없이 츄르를 핥아먹는 페라리에 눈을 고정한 채 철훈은 대답했다. -오구오구 우리 페라리 많이 먹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철훈은 페라리가 정신없이 혀를 놀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페라리의 빈 그릇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만 같았다. 정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 철훈의 빈 그릇은 무엇이었을까.
- 어제 저녁엔 뭐 먹었어요?
- 짜장면이요
- 엊그제는요?
- 서브웨이요
- 그 전날은요?
- 어.... 편의점도시락인가
- 그 전날에는요?
- 왜 계속 물어요?
철훈은 이상하다는 듯 정민을 쳐다보며 배달일을 하면서 치킨 냄새를 너무 자주 맡아 치킨은 안 먹는다고 덧붙였다. 철훈이 굶고 다니는 게 아닌데도 정민은 괜히 그가 안타까웠다. 철훈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주먹부터 나가는 불같은 성격에, 단순하고 철없어 보이는 행동들, 자격지심에 가득 찬 모습은 의젓한 진짜 남동생 정환과는 딴판이었지만, 정민은 다른 의미에서 철훈이 새로운 남동생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철훈이 오늘도 차려져 있을 그 진수성찬을 함께한다면 그 또한 셰프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고, 나중에 셰프를 찾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나. 안 그래도 항상 남는 반찬이 아까웠던 차였다. 정민은 정환에게 묻는 마음으로 철훈에게 물었다.
- 묵직한 그릇 좀 싹싹 비워 볼래요? 눅눅한 포장지나 종이박스 말고.
*
302호에 정민이 입주한 이후로 정민이 아닌 사람이 들어온 것은 철훈이 처음이었다. 철훈도 혜미의 자취방 말고는 여자 혼자 사는 집은 처음이었기에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철훈은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서며 더듬더듬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휘양찬란하게 차려진 상차림을 보고 철훈은 정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헸다.
- 이야, 이거 배추적 아닙니까?
철훈은 반갑다는 듯 식탁으로 성큼 다가가 희고 길다란 전을 거침없이 손으로 죽 찢어 먹었다. 철훈은 입안 가득 배추적을 넣은 채 -배추적 맞네, 기가 맥히네- 우물거리며 말했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정민이 그를 쳐다보자 철훈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 배추적을 몰라요?
- 몰라요.
- 이래서 서울 사람들은 쯧쯧. 난 이 셰프 맘에 드네요. 합격 드립니다.
- 배추적이 뭔데요?
철훈은 배추적이 배추로 만든 ‘특별한’ 전이라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 경북에서 제사상에 항상 올라가는 건데, 아 그니까, 배추에다가 밀가루 물을 묻혀 가지고요, 아 내가 이걸 어떻게 아냐면 내 고향이 구미인데- -그럼 그냥 배추로 만든 전이잖아요- 정민은 별 감흥없이 대답했다. -아이, 그게 아니라니까- 철훈은 변명하려고 했지만 정민은 말을 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나는 이 셰프가 누구인지 찾고 싶어요.
- 에이, 그냥 모른 척하고 이렇게 좀 얻어 먹어요. 나도 이렇게 공짜로 밥 해주는 사람 좀 있었으면 좋겠네. 원래 경북사람들이 말하는 건 투박해도 정이 많습니다. 보니까 이 셰프라는 사람도 빼박 경북 사람이네
- 그래도 저는...
- 계속 얻어먹다가 혼자 다 못 먹겠다 싶으면 나를 꼭 불러요, 예? 내가 깔끔하게 해결…
- 어쨌든 난 셰프를 찾고 싶어요! 내 집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이렇게 잘 차려줘도 나중에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정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서는 수상하다는 듯 눈썹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 혹시, 그쪽은 아니죠?
- 나요?
- 아휴, 됐어요.
괜히 물었다는 듯 정민이 손사래를 쳤다. 정민의 반응에 약이 오른 철훈은 발끈해서 되받아쳤다.
- 그 표정은 뭡니까? 내가 여자였으면 백프로 현모양처 될 사람이에요!
- 어제도 짜장면 사 먹었다면서요.
- 그건 바빠서 그런거죠, 일이
- 셰프는 그런거 안 따질 사람이에요
- 새벽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합니까?
진심으로 서운해 보이는 철훈의 얼굴을 뒤로하고 정민은 서둘러 식사를 시작했다. 철훈도 본격적으로 밥을 입에 푹푹 떠넣기 시작했다. 달달한 뭇국과 짭잘하고 달달한 잡채, 윤기가 흐르는 소꼬리찜, 구수한 곤드레밥이 담긴 접시들이 점점 빈그릇이 되어갔다. 철훈은 마지막 배추적을 양념간장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단순한 성격때문에 정민은 철훈이 동생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철훈은 계란 한판을 채운 정민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았다.
- 그, 셰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 같은데요? 뭐 단서가 있어야 찾지 않겠습니까?
- 셰프는 화락맨션 사람이에요.
- 여기 그런 사람이 산다고요?
- 네 확실해요. 나를 마른 체형의 사람으로 알고 있더라고요, 난 화락맨션 살기 전까지는 말랐던 적이 없거든요.
- 그리고요?
- 음... 튀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조용조용해도 뭐 하나에는 진심인 사람, 아, 한식에 정말 진심인 사람일 거예요
- 그걸 어떻게 알아요?
- 이 음식들에 다 써 있어요. 난 그걸 요 몇주간 매일 먹었고요.
- 의심 가는 사람 있어요?
- 303호. 옆집이요.
정민은 오른쪽 벽을 가리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4층에 사는 철훈은 303호의 지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철훈은 그 김지연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는 표정을 지었다.
- 303호가 진짜 조용하고 음침한데 뭐 하나에 진심인 것처럼 보여요. 항상 책을 끼고 살기도 하고, 뭔가에 열중해 있거든요. 또 옆방이니까 내가 출퇴근하는 시간 맞추기도 수월할 거고.
바로 수긍하는 철훈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정민은 자꾸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철훈에게 울컥 마음 속의 바람을 꺼내놓은 것이다.
- 먹은 값 좀 해줘요. 혼자보단 둘이 낫겠죠. 같이 찾자구요
철훈은 별 고민도 없이 부른 배를 토닥이며 흔쾌히 승낙했다. 대신 원할 때 셰프의 음식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정민도 승낙했다. 이렇게 정민은 기나긴 혼밥 생활을 청산하고 처음으로 식사메이트를 가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