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식구의 탄생>
오늘 아침에도 정민은 퇴근을 하고서 식탁 앞에 한참을 굳어 있었다.
식탁 위를 눈으로 훑는다. 현미밥, 바지락찜, 더덕구이, 떡갈비, 갓김치.
그리고 노란 포스트잇에 적혀있는 쪽지.
<김치찌개를 참다니. 이건 못 참을걸요.>
타이핑이 되어있었다. 글씨체를 알 수 없어 어떠한 인간적인 특징도 추리해볼 수 없었다. 불룩했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목격한 것일까. 정체불명의 셰프는 약이 오른 듯 더 먹음직스럽고 더 비싼 반찬을 준비해 왔다.
- 진짜 미친놈 아니야?
정민은 식탁을 둘러봤다. 간장양념을 좋아하는 정민에게 막대 모양의 떡갈비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중앙에 얇은 가래떡을 둘러싼 다진 고기가 노릇노릇하니 보기 좋게 익어 있었다. 제철을 맞은 바지락찜의 비릿하고 달달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다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모두 천천하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정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불신이 팽배한 이 시대에 조금도 통하지 않는,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방식으로 차려진 이 근사한 한 끼.
- 당신을 어떻게 믿고 내가 이걸 먹어,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신경질적으로 다시 고무장갑을 꼈다. 알록달록한 음식들은 또다시 쓰레기 봉투행 열차를 탔다. 보란 듯이 쓰레기 봉투를 싱크대에 그대로 놓았다. 봉투에 바지락의 화려한 껍질들이 비쳤고 떡갈비는 둥그런 형체도 없이 뭉개졌다. 또 멀쩡한 음식들을 버리게 된 것에 죄책감과 짜증이 울컥 올라온 정민은 스마트폰으로 거침없이 112를 눌렀다.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하지만 손가락은 멈췄다. 퇴근길에 확인한 화락맨션 게시판에는 며칠 뒤 모든 방에 대한 잠금 장치 점검을 하고 도어락을 설치할 것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어차피 이제 들어오지도 못할 거, 될대로 되라지-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정민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먹음직스러운 그 음식들에 마음이 동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했다. 정민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서 유투브의 마음 챙김 영상으로 불편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 호흡이 단전까지 닿게 들이 마시세요. 자, 하나, 둘, 후...
정민의 손에서 그 음식의 온기가 떠나지를 않았다. 그럼 요 며칠간은 그 밥상을 볼 수 있는 건가. 도어락 공사가 끝나면 이제 그 투명인간 셰프는 다신 내 밥상을 차리지 못 하겠지. 다시 식탁에는 먼지만 쌓여가겠지. 뭐지. 이거 서운함인가. 흠칫 놀란 정민은 다시금 눈을 꽉 감았다. 화락맨션에 처음 들어온 그날을 떠올리며 애써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 나는 깊은 잠에 빠진다. 나는 두둥실 떠오른다
*
다음날 새벽 두시.
분침과 초침이 활짝 꽃을 피웠다.
편의점 휴식시간이자 정민의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정민은 잠시 찝찝한 유니폼 조끼를 벗고 창고로 들어가 도시락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얼마 전 새로 출시되었다던 함박 스테이크 정식 도시락을 먹을 참이었다.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서 1분 30초 돌리고, 옷소매를 손에 덧대어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 위로 격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후후 불어 식히니 시큼하고 달달한 함박스테이크 소스 향이 코를 자극했다. 나무젓가락으로 함박스테이크를 살짝 들어 올린다. 밑에 계란 지단 뭉치가 폭신하게 깔려 있었다. 이런 종류의 계란 뭉치는 다른 도시락에도 자주 사용되곤 한다. 지단이 명주실처럼 얇게 썰렸다는 것은 기계의 솜씨가 작용했다는 뜻이었다. 정민은 스테이크를 젓가락으로 숭덩숭덩 조각내었다. 그렇게 한 조각을 입속으로 넣으려는 찰나였다.
- 우, 우웩
불쾌한 구역질 소리. 알바생을 호출하는 소리였다. 정민은 뜨끈한 스테이크를 뒤로한 채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음료수 냉장고 앞 바닥에는 이미 붉고 얼룩덜룩한 토사물이 그득했다. 그 옆에는 한껏 치장한 중년의 여자가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 어머, 자기야, 나 또 속이 안 좋.. 읍..
연신 소매로 입을 닦으며 헛구역질을 하는 여자에게 정민은 로봇처럼 화장실 키를 쥐어주며 - 나머지는 여기서 하세요- 무감각하게 말했고, 대걸레를 가져와 토사물을 치웠다. 그런 정민에게 여자는 알코올에 절어 꼬부라진 발음으로 물었다.
- 쓰읍, 화장실 거울은 있지?
- 있어요
- 휴지도?
- 문 앞에 있어요
- 어우, 여기 알바는 왜 이렇게 불친절해
정민은 못 들은 척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토사물을 치워주는 것보다 어떻게 더 친절할 수 있을까. 여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정신없이 대걸레질을 한 뒤 창고로 돌아오니 스테이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밥맛은 뚝 떨어진 정민은 도시락을 그대로 덮은 채 쓰레기통에 넣었다.
새벽 네시 반이 되자 어둠이 조금씩 힘을 풀기 시작했다. 졸음이 쏟아지자 정민은 애써 잠을 깨기 위해 휴지를 만지작거리며 꼬았다. 그렇게 꼼지락 대기를 십분, 얇고 힘없는 휴지 두 쪽은 꽃잎들이 섬세하게 살아있는 흰 장미 한 송이가 되었다. 매일매일 정민은 그렇게 졸음이 쏟아질 때마다 손을 꼼지락대며 휴지꽃, 빨대 팔찌 따위를 만들어 냈다.
정민의 아버지는 정민의 손재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초등학생 때부터 복지관에서 매듭 공예, 프랑스 자수 따위를 배우게 했다. 강사는 정민의 결과물을 보면서 자주 뿌듯한 미소를 짓곤 했다. 하지만 중급반에서 고급반으로 넘어가 제법 어려운 도안의 것들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좀처럼 속도가 붙지를 않자 정민은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칭찬의 양과 질도 줄어들기에 바빴다.
- 정민아, 왜 빠릿빠릿하질 못하니. 손을 이렇게 더 움직여봐
투입 대비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효율성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건 정민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정민은 결과에 비해 투입이 거대했고, 빠릿빠릿하지 못했다. 그래도 정민은 악세서리를 만드는 일에 진심이었다. 그래서 주얼리디자인학과를 졸업했고 나름 손재주와 핸드드로잉 실력도 인정받았다. 여태껏 제작했던 작품들을 꼼꼼히 기록한 포트폴리오 덕에 주얼리 브랜드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물 다섯의 나이에 당차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그 결론은 슬프게도 재계약 불가였다. - 다른 사람들이 반지 세공 두 세개씩 해낼 때 너는 몇 개 했니? -그렇지만 아직 흠집이 남아 있어서... -완벽한거 요구한 적 없어. 적당히 하고 넘기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그래도 이렇게 해야 더 질이 좋은데요 -좋고 안 좋고는 회사가 결정해. 넌 그냥 적당히 하면 돼, 적당히.- 회사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이런 대화의 변주들로 가득했고, 정민이 만든 반지들은 곧 순진함과 비효율의 표식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정민의 쓸모를 판별했다. 결국 '적당히'의 기준을 끝내 알아낼 수 없던 정민은 일자리를 잃었다.
당시의 정민은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도 몰랐다. 암으로 밥도 잘 못 씹어 삼키는 아버지에게 잘렸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를 않아 정민은 계속 회사에 다니는 척을 했다. 너처럼 손재주있는 사람이 이렇게 잘릴 줄 몰랐다고. 주변인들은 정민에게 의문을 품었다. 정민은 사람들의 텅빈 걱정들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던 아버지는 암으로 점차 말라만 가고, 유동식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정민은 돌연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죽을 이유와 용기까지는 없었다. 그저 비교당하고 싶지 않았고 쉽게 판단받고 싶지도 않았다.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무서웠지만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무서웠다. 눈빛만 보아도 절로 읽히는 생각들의 쉼 없는 소음에 시달렸다. 방을 구성하고 있는 죽은 나무들, 맡은 과업만을 수행하는 기계들. 식탁. 앉은뱅이 책상. 냉장고. 세탁기. 두터운 이불. 그때의 정민에게는 오직 그런 물체들만이 무해했다.
그때의 정민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동네 부동산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 공인중개사가 우연히 추천해 준 곳이 화락맨션이었다. 그 쇠락한 건물의 302호, 그 작은 방으로 정민은 마법처럼 이끌렸다.
처음 방에 들어온 날을 떠올렸다.
정민은 새우잠 자듯 맨바닥에 누워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회상했다. 떠오를 수 있었던 나날들. 삶을 지탱해주는 그의 위로 속에서 안심했던 그 공간. 결국 그해 말 정민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정민은 어느새 손에 만발한 흰 장미꽃들을 보고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민은 미련없이 손재주의 결과물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 그건 그저 휴지쪼가리일 뿐이다. 조금 힘주면 금세 구겨질 휴지조각일 뿐이야 – 정민은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
잠시 손님 발길이 끊겼다.
정민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 띵동!
갑자기 울린 출입문의 벨소리에 정민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개진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어디서 봤더라. 익숙한 얼굴. 기억을 더듬어본다. 화락맨션 윗층에 사는 그 남자였다. 밤에 출근하는 그 포로리 아빠.
그는 평소와는 달리 잿빛 양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답답했는지 와이셔츠 윗 단추 두 개를 풀고 있었다. 그는 맥주 두 캔과 마른 오징어를 집어와 계산대에 올렸다. 정민을 알아본 건지 그는 정민을 흘끗 보더니 바로 눈을 피했다. 계산을 마치자 그는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홀로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정민은 창밖으로 그가 낮은 도수의 알콜향에 절어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덩달아 얼큰하게 취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검은 세단 하나가 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좁은 편의점 골목에 굳이 주차를 하려는 것 같았다. 세단은 그의 가까이로 바짝 붙기 시작했고 결국 그가 앉아있던 파라솔을 넘어트렸다. 그가 마시던 맥주와 오징어가 바닥으로 냅다 뒹굴었고 그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차주는 창문을 열더니 –아이 씨, 뭐야, 이 시간에 왜 밖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난리야- 사과를 하기는커녕 놀란 그에게 독설을 쏟아낸 것이다.
- 뭐요? 아저씨, 나와봐요, 아니, 밥상을 엎었으면 사과를 해야죠!
차주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오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꽤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는 아랫 사람을 타이르는 거만한 투로 말했다.
- 잘 모르나본데, 여기 편의점 점주가 내 동창이야, 내가 야외에 파라솔 좀 놓게 허락해줬더니 이렇게 내 주차 구역을 침범한 거라고, 뭘 좀 알고 따지란 말이야, 어?
- 그럼 점주한테 뭐라할 것이지 왜 손님한테 난립니까? 예?
- 뭐 이 새끼야? 으른한테 말버릇 좀 봐라!
차주는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쳐 넘어트렸다. 쿠당탕-! 주택 지역의 새벽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 바닥을 구른 그는 벌떡 일어나 양복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 에이 씨팔, 오늘 일진도 사나웠는데 잘됐네
그렇게 둘은 편의점 앞뜰에서 마구 파라솔을 넘어트리며 주먹을 주고받게 된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차주와 멱살잡이를 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센치하게 홀로 맥주를 홀짝이던 윗층 남자의 얼굴에는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기어코 피를 보는구나- 처음 보는 격한 주먹다짐에 겁이 난 정민은 경찰을 호출하는 비상벨을 눌렀다. 윗층의 남자는 한참을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다가 그 남자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고 말했다.
- 에휴, 이런 놈도 결혼을 하는데 제기랄
그러더니 그는 체념한 듯 공격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맞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방어만 하던 그는 피떡이 된 얼굴로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 아저씨, 나 때린 것보다 아저씨한테 더 맞았습니다, 예? 괜히 나중에 일 크게 만들지 마쇼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린 주먹다짐. 차주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의 뒤에 대고 화가 난다는 듯 – 이 새끼야, 어디가! 이 새끼, 내빼는구나!- 소리쳤지만 그는 미련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관 둘이 차에서 내리자 정민은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가 소란을 일으킨 두 사람이 분명 여기 있었는데 소리도 없이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분명히 여기 파라솔을 밀치고 치고 박고 싸우셨거든요, 한 사람은 양복을 입고 있었구요, 또 한 사람은 한 오십대 정도 되어보이는데...
- 저기요,
- 네?
경찰은 날선 가위로 고무줄 끊듯 정민의 말을 끊었다.
- 웬만해선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 ...
- 여자라고 무서우니까 호출벨 자주 누르시는 건 알겠는데요, 저희도 야간에 출동하기 피곤하거든요.
- 아...
- 그냥 이렇게 행패 부리다가 제풀에 꺾여서 알아서 집 찾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여기서 알바 꽤 오래 하지 않았나? 몰랐어요?
사실 정민은 오늘 호출벨을 처음 누른 참이었다. 분명 오해가 있었지만 해명은 그들에게 결국 변명처럼 보일게 분명했다. 정민은 반박할 마음을 잃었다.
- 대충은 알아요
- 경찰들도 바쁩니다, 네?
- 죄송합니다
딱히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과를 했다. 아까는 정말 남자 둘이 격하게 몸싸움을 해서 한 남자는 얼굴에 피칠갑을 했는데. 정민은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부유하는게 알바생의 역할이라고. 경찰들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오전 여덟 시가 되자 정산을 끝내고 퇴근길에 올랐다. 정민은 아무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늘 내내 겪었던 불쾌한 일들이 표정으로 자꾸만 튀어나오려 했기 때문이다. 정민에게는 일상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없었다. 모든 사건들은 정민의 안에서 소화되고 삭혀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던 정환에게 전화를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이 모든 연락을 끊고 은둔해버린 못난 누나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연락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오늘 같은 날에는 걱정 인형이 필요했다. 정민은 울컥하는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저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절실해져 연락할 변명을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민이 서럽고 우울하다는 건 엄마에게 정민의 전화를 받을 이유가 되지 않았다. 정민은 매일같이 차려지는 음식 핑계를 댔다. 혹시 몰래 집에 밥을 해놓고 갔냐고, 속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
- 얘, 나 지금 너 어디 사는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왜 너한테 밥을 해주니?
당당한 물음에 할 말을 잃은 정민은 혼잣말하듯 말했다.
- 다, 다른 엄마들은 다들 자식들한테 상다리 부러지게 밥 해주던데...
- 그럼 다른 엄마 자식으로 바꾸든가.
- 그래도 한번 정도는 해줄 수...
- 하, 진짜 아침 댓바람부터 뒤집어지게 놀랬네. 너 이거 형원씨가 봤으면 어쩔 뻔했어? 갑자기 연락하지 마 이년아. 안 그럼 다시 번호 바꾼다!
끊겨버린 전화. 정민은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스마트폰을 멍하게 쳐다봤다. 아빠 친구와 진작에 살림 차리고 집을 나간 엄마에게 뭘 기대하고 전화를 걸었을까. 걷다 보니 벌써 화락맨션 대문 앞이었다.
나 위로해줄 사람 없어요?
어떻게 날 위로해줄 한 사람이 없어?
정민은 오늘 누군가의 토사물을 치워주고서도 불친절하다는 욕을 먹었고, 격한 주먹다짐과 흐르는 피를 분명히 코앞에서 목격했고, 경찰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엄마에게는 성가시고 피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정민은 여느 때처럼 302호의 열쇠를 돌렸다. 뻑뻑하게 열쇠가 돌아간다. 문을 연다. 다름 없이 또 차려져 있는 식사. 낡은 운동화를 벗고 식탁으로 다가간다.
식탁 한구석에 쪽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한입이라도 먹어줘요.>
눈물이 울컥 터졌다.
당신을 위한 것. 그러니까, 나를 위한 것-
그 쪽지는 정민이 오늘 겪은 최초의 친절이었다.
정민은 와르르 쏟아내듯 눈물과 속마음을 털어냈다. 나 오늘 너무 서러워요.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민은 아이처럼 울었다. 그 짧은 쪽지는 정민의 의심을 순식간에 해독해 버렸다. 아빠가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몸에 좋고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이 떠올랐다.
냄새들이 콧속으로 들어오자 곧 식욕이 돌았다. 정민은 여느 때처럼 식탁의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흰쌀밥, 미역국, 돼지갈비찜, 늙은호박조림, 숙주나물무침, 연근조림, 배추김치. 아주 특별할 건 없었지만, 사라진 식욕 탓에 음식을 해먹을 의지도 잃어버린 정민에게는 모두 귀한 반찬들이었다.
최초의 접촉.
정민은 흰쌀밥 한 숟갈을 입속으로 떠 넣고서는 갈비찜의 살을 한움쿰 떼어 함께 씹었다. 갈비찜에서는 새큼한 살구향이 났는데, 그게 간장맛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은은하고 기분 좋았다. 숙주나물과 김치를 한 젓가락씩 떠서 함께 먹으니 끝맛에서 깔끔한 상쾌함이 감돌았고, 간장 맛이 나는 늙은호박 조림은 짭쪼름하고 달달해서 자꾸 입맛을 당겼다. 연근조림은 식감이라는 필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서걱거림이 입 안에서 한참을 맴돌다가 떠났다. 참기름 향이 솔솔 나는 따끈한 미역국 덕에 밥과 반찬도 술술 넘어갔다. 무엇 하나 그냥 지나가는 맛이 없었다. 오래오래 여운을 주다가 입을 떠났고 정민은 그게 아쉬워 반찬들 하나 하나를 입에 넣고 한참을 씹었다.
배가 차오르면서 몸과 마음도 차오르고 있었다. 정민은 더 따뜻하고 실한 내용물로 가득 찬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솜 따위로 가득 차 말랑말랑하고 누르는 대로 푹푹 꺼지는 봉제 인형 말고 단단하고 뜨끈한 충전재로 채워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정민은 이 근사한 셰프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토록 호감을 부르는 침입자라니.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돼-
정민은 연신 혼잣말을 하며 아끼는 포스트잇에다 꾹꾹 눌러 쪽지를 썼다.
<잘 먹었어요, 셰프. 정말 맛있네요. 고맙습니다.>
잘 보이도록 식탁 정중앙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마음의 방에 쌓여있던 독소가 해독된다.
- 밥으로 위로 받는다는 말. 그말이 진짜였네 -
따뜻한 뱃속을 가지게 된 정민은 기분 좋게 오늘 하루의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