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실패가 뉴노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2024년은 한국 축구에 유난히 잔인하다.
명단만 보면 우승 후보.
손흥민, 황희찬, 김민재, 이강인을 한번에 출전시킬 수 있는 나라. 지난해 말 한국 축구 팬들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 불은 언론이 먼저 나서서 지폈다. 어느새 달궈진 군불과 같은 기대감. '60년 만에 아시아 정상'을 노릴 수 있게 됐다는 낙관론은 혹시 나올지 모르는 현실파 비관론의 자리를 압도했다. 올해 초 드디어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 축구가 아시아 호랑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물론 이른바 '월클' 선수들이 속한 클럽의 팬들도 ‘엄지 척’하게 만드는 우리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언론들로부터 상대팀 선수들과 비교에서 항상 승부 예측 우위를 점했다.
졸전과 불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했기 때문일까? 예선부터 위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레인을 3대1로 이겨 '역시'라는 찬사를 받더니 곧바로 한수 아래라던 요르단과 2대2로 비겨 '의문'을 남겼다. 졸전은 이어졌다. 약체로 평가받던 말레이시아를 만나 3대3으로 비겨 '이거 뭐지?' 비판을 받다가도 16강전에선 강호 사우디아라비아를 만나 승부차기 끝에 물리쳐 '안도'로 한숨 돌렸고, 8강에선 최강 호주마저 2대 1로 물리쳐 '그치'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60년 만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듯 싶었다.
우연과 필연.
가보지 않은 길은 여기까지 였다. 예선에서 2대2의 졸전을 펼쳤던 요르단과의 4강전. 다시 만난 만큼 이번에는 이겨서 결승까지 갈 수 있을거란 기대는 순식간에 꺾였다. 이긴 경기는 아무나 분석할 수 있지만 패한 경기는 조심스럽다. 누군가는 희생양이 돼야하기 때문이다. 감독이냐 선수냐 참패의 원인을 찾고 있을 무렵 의외의 불화설이 대표팀 내부와 한국 축구계를 강타했다. 다시 만난 요르단에 한골도 넣지 못하고 0대2이라는 졸전에 마음이 상했던 축구팬들은 이제 손흥민과 이강인의 입에 주목해야 했다. 언론은 뒤늦게 경기 중계 영상과 그동안 찍혔던 사진들을 확인해가며 이번 결과를 다시 짜맞춰가기 시작했다. 마치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믿고 싶었던 게다. 그렇게 해서만이라도 주장 손흥민 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붕대의 원인과 경기 결과를 이어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섣부른 원인 분석과 진단은 필연을 우연으로 만들고, 다음에는 예전처럼 다시 잘 될거라는 희망까지 품게한다.
2023년 초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클린스만은 아시안컵 결승 진출 실패 이후 1년 만에 경질됐고, 2021년부터 23세 이하(U-23) 대표팀을 맡고 있던 황선홍 감독이 국가대표팀 임시 감독까지 동시에 겸했다. 2024년의 4월은 한국 축구의 잔인한 역사에 새로운 챕터를 또 장식했다. 1984년 LA 올림픽 이후 40년 만에 한국축구는 올림픽 본선에 탈락했다.
올림픽에서 축구가 가지는 팬덤은 올림픽 흥행에 결정적이다. 팬들에게도 축구 중계를 하는 방송국이나 광고주들에게도... 2024년 여름 파리 올림픽에서 사라진 한국 축구는 예선, 16강전 진출 소식을 전하는 대신, 다음 감독 선임과 월드컵 준비 어려움이란 기사를 더 접해야 할 상황이다.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협찬하고, 광고 모델로 썼던 기업들도 한번도 40년동안 겪지 못한, 익숙하지 않은 길이 올해 봄 한국 축구 대표팀과 팬들, 중계방송을 준비했던 방송사들 앞에 열렸다. 40년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결과와 전혀 다른...
국가대표 경기 등 큰 경기가 있을 때 간혹 그 팀 감독의 운세를 팀의 운명과 맞춰보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을 때 감독의 사주를 명리학을 통해 찾아보고, 해당 팀의 승부 결과에서 필연성을 찾아보고자 하는거다. 올해 한국축구는 1, 2월에는 위르겐 클린스만 독일 감독이었고, 파리 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팀을 가릴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는 황선홍 감독이 좌절을 맞보았다. 어느 감독의 사주 탓을 하기에는 대표팀 운영과 한국 축구계 자체에 대한 쓴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예선전에서 한국에게 유일하게 패했던 일본은 U-23 아시안컵에서 우승했고, 한국에게 8강 탈락의 성적표를 안겼던 인도네시아는 4위로 올림픽 진출을 향한 불씨를 계속 살리고 있다. 이쯤되니 베트남의 영웅 박항서 전 감독에, 이번 인도네시아의 영웅 신태용 감독, 황선홍 감독은 물론 손흥민 아버지까지 감독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60년 만에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다 실패한건 익숙한 노멀(normal)이다. 반면, 40년 만에 가던 길을 가지 못한 것은 일단 새로운 길이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하는데 난관이 많거나, 새로운 길을 가려는 데 결국 익숙한 여정과 결과와 마주하게 되면 망설이게 된다. 난 새로운 길을 열었을까? 아니면 나는 모르지만 결국 익숙한 길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뉴노멀(new-normal)이란 말이 있다. 위기나 변화를 겪은 뒤에 다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상황이 정착된 상황이다. 계획대로 사려는 사람들은 뉴노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준비하려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을 볼 때 생각한 음식을 사전 계획대로 만들려고 하는데, 막상 마트에 가보니 해당 식자재가 없다. 다른 음식을 만들어야 할까? 다른 재료를 넣은 그 음식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야 할까?
환경이 바뀌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는 뉴노멀(new-normal)이 점점 보편적인 시대가 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환경이 다 그렇다. 2년 전까지는 코로나19 탓으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떠나간 손님들이 다시 돌아오고, 시장은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고,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고, 한번 실수는 얼마든지 극복이 되고, 팍팍해진 살림살이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고, 몇만 원어치 장보면 그래도 먹을게 있고, 치솟는 물가는 제자리를 찾고, 돌반지라도 사줄 수 있을 만큼 금값은 좀 떨어지고,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은 우승은 고사하고 가을야구 만이라도 이제 할 때가 됐고…
익숙함이 사라진 새로운 것이 뉴노멀인 경우 나의 선택은 두가지다. 첫째,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다시 예전처럼 좋아지도록 바꿔야 한다. 나쁜 결과가 노멀이 되지 않도록... 둘째, 만약 결과가 좋아졌다면 이제는 발전한 상황이 노멀이 되도록 그 방법을 계속 써야 한다. 결국 노멀이든 뉴노멀이든 난 예전의 나로 돌아가서는 안되는건 똑같다. 좀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뭔가 잘 잡히지 않는데 주역에는 이럴때 'go'보다는 'stop'하라고 얘기한다.
"암흑과 혼돈.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전진하려고 하지 말고 잠시 머무르며, 공부하고 힘을 기른다. 앞에 장애가 있는 만큼 어리석게 나아가기 보다는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의심해야 한다. 위기가 있으면 피할 곳이 있어야 하고, 거듭되는 위험에는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시련이 지나갔다고, 곧바로 방심은 금물이다. 또 하나가 더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