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철썩… 철썩…”
부드럽게 물살을 휘감으며 밀려오는 파도들이 검은 바위에 힘껏 부딪치며 새하얀 물보라로 흩뿌려진다. 마치 단단한 검은 바위와 한판 승부를 보려는 듯, 끊임없이 밀려와 있는 힘껏 몸을 던지고 산산이 부서진다. 자신이 사라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러나 파도는 정말 사라진 걸까?
파도에서 물보라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가 물방울로 흘어졌다가 이내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뿐.
바다와 파도의 퍼포먼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힘껏 외쳤다.
“나도 저 파도처럼 멋지게 내던지고 싶다. 나 자신을… 이 삶 속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뿜어져 나올 듯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곳 신흥리 마을로 이사 온 지 5개월이 되어갈 때 즈음이었다. 제주로 처음 내려왔을 때 갈림길에 놓였던 것처럼 또다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방황을 시작했다. 나는 마치 한치의 앞길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무작정 걷고 있는 듯 불안했다. 겉으론 동네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하루하루를 갉아먹고 있는 듯 불편하고 불안했다.
“요가수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몇 년간 제주와 인도, 발리를 오가며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을 다 털어쓴지 오래다. 그러니 요가센터를 차린 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외부 출강을 하고 싶어도 수요가 별로 없으니 제안을 해볼 만한 곳도 없었다. 다른 요가원에서 수업을 하려고 해도 경력이 없는 나를 채용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어딘가에 나를 묶어둘 마음도 없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독립적인 요가수련 공간을 마음속에서 계속 갈망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내가 살고 있는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어느 날 아침, 문뜩 한 생각이 떠올랐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에 바다에서 주어온 나무판자를 들고 동네 친구가 운영하는 공방으로 향했다.
“이걸로 요가원 간판을 만들고 싶어.”
캘리그래피를 하는 친구라 간판글을 붓으로 적어주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해줄게, 언니.”
“고마워!”
다음날, 기분 좋게 식사 준비를 했다. 혼자 먹을 식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만들다 보니 네 명이 먹어도 넉넉한 양이었다. 옆집 언니를 불러 같이 아침 겸 점심을 먹자고 했다. 쑥 된장국, 감귤 마멜레이드를 올린 샐러드, 양배추 볶음, 계란 프라이까지… 소박하지만 정성껏 차렸다. 막 숟가락을 뜨려고 하는 그때 공방 친구가 간판을 들고 집에 찾아왔다.
“언니, 간판 가져왔어요.”
“마침 잘 왔어. 같이 밥 먹자.”
자연스럽게 모인 동네 친구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언니, 제 친구가 이 동네에 살고 싶다면서 빈집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뒷 집이 비어있어. 집 한번 봐볼래?” 옆집 언니가 대답했다.
“나도 가볼래 그 집.” 나도 덩달아 합세했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 부동산 사장님 안내로 그 빈집을 보러 갔다.
오솔길 같은 흙길을 따라가다 보니 회색 지붕의 단독 주택이 보였다. 전에 귤 창고로 사용했던 건물을 주택으로 개조한 듯했고 귤밭 속에 숨어있어 앞, 뒤로 귤나무들이 집을 포근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마디.
“여기서 요가하면 참 좋겠다!”
다음날, 나는 집주인을 만나 그 집을 계약하게 되었고, 아빠에게 급하게 도움을 요청해 2주 동안 함께 집을 정리했다. 도배와 장판을 새로 갈고 외벽은 다시 깔끔하게 페인트로 칠하고 귤밭은 깨끗하게 정리했다. 아빠와 단둘이 2주라는 시간을 함께 지낸 것도 처음이었다. 노쇠한 아빠의 뒷모습에 울컥하기도 하고, 서투르지만 성심껏 차린 식사를 맛있게 드셔주시는 부모의 마음, 딸의 부름에 두말없이 한 걸음에 달려와주신 아빠의 사랑을 알게 된 고마운 시간이기도 했다.
2주 만에 내 생애 첫 요가원이 기적같이 오픈을 앞두게 되었다. 말이 요가원이지 여섯 명 정도 수련할 수 있는 소규모 수련실이다. 일반 요가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 무척 생소했다. 주택에서 요가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볶듯이 공간은 준비되었지만, 이런 시골에 요가하러 올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오픈을 앞두고 걱정이 앞섰다. 고민 끝에 오픈 전 이틀간 무료수업을 열기로 했다. SNS에 공지를 올리자 기적처럼 세 명이 신청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들이다.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시작할 수 있었을까 싶다.
홀로, 제주에서 요가 선생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공간과의 만남은 이렇게 어느 날 문뜩, 기적처럼 찾아왔다. 내가 파도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나는 부단히 나를 내던지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한다. 파도가 되어.
그렇게 나는 제주에서 열한 번째 새해를 마중하고 있으며, 이곳 신흥리에서 7년 차 요가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