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신화일까?
대부분이 생각하는 동영상의 원리는 이러하다: 먼저 글이 있고, 그것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움직이는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서 만들면 영화이고, 일일이 그려서 만들면 2D 애니메이션이다. 한마디로 전 과정이 글을 시각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나도 글을 먼저 쓰고 그것을 시각화하면 영상이 나오는 줄 알았다. 글 중에서도 가장 시각적인 글인 신화를 연구했으니 더 했다. 같은 디몬 demon의 이야기를 담은 54개의 크고 작은 신화들을 5년 동안 반복해서 읽다 보니 머릿속에는 거대한 판타지까지 그려졌다. 글에서 영감을 받아 시각으로 옮기는 체험을 혼자 했다. 이런 시각적 체험이 애니메이션 창작을 하는데 더없이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칼아트 강의스케줄에서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애니메이션 스토리 창작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시나리오 강의가 일 학년 일 학기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강의는 거의 다 그림에 관한 강의였다. 칼아트 입학 이후 바람 잘 날이 없는 내 마음이 또 다른 돌풍을 맞았다. 디즈니사가 어린이를 타깃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혹시 배울 것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에서 시나리오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었나?
하나 있는 시나리오 수업마저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다른 그림강의들과 엉키지 못하고 떠다니는 글강의 같았다. 강의내용은 분명 할리우드의 전통적 스로리텔링의 기본이 충실한 것이었다. 이것에 관한 대표적인 책인 로버트 맥키 Robert Mckee의 [스토리] [Story](국내 번역서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책이 교재였다. 강의 내내 한 주에 한 단락씩을 읽고, 요약하고, 질문에 답하고, 주제에 맞는 단편 하나를 써내는 것이 다 였다.
시나리오 강사는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문학을 전공한 과제중심의 깐깐한 백인강사였다. 밀린 과제를 다 해내고 기말시험에서 하나 틀리고 에이 플러스받고 끝냈다. 남은 건 점수밖에 없었다. 칼아트에서 점수는 큰 가치가 없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쏜살같이 기본적인 지식과 시나리오 양식 쓰는 법만 얻은 것이다. 하지만 학기가 끝나가도 할리우드 스토리텔링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이걸 왜 배우는 거지?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칼아트에서 시나리오강의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왜? 또 다른 질문의 촉수가 세워졌다. 질문의 촉수는 답을 찾아 여기저기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걸려든 정보들이 생겼다. [디자인] 강사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이다: "픽사는 스토리텔러들이 스탠포드 대학 출신이라더라. 디즈니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해!" (픽사는 디즈니가 산 것일 뿐 제작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픽사는 브레인이 있는데 디즈니가 노 브레인 no brain이라고? 이해를 할 수 없는 소문 같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리틀멀메이드?]인가 제작에 관한 책에서 디즈니가 시나리오 쓰기를 "시도했다"는 글을 읽었다. 그 증거로 대사 몇 줄 쓴 것이 맘에 안 들어 연필로 줄을 막 그어놓은 자료들을 올려놓았다. 그것도 별반 심각하게 시도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자료 자체가 충격이었다. 디즈니는 시나리오를 안 쓰고 애니메이션을 제작을 해왔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각색에 관심이 있었다. 남의 이야기를 각색할 때 시나리오 작업은 필수라고 여겼다. 하지만 . . . 디즈니 작품 중 흥행에 성공한 애니메이션의 70~80 퍼센트가 모두 각색이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부터 [피노키오] [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 앨리스] [101마리 달마티안]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노트르담의 꼽추] [뮬란] [포카혼타스] [타잔] [정글북] [지니]등등 셀 수없이 많다. 각색을 들이대며 시나리오의 필요성을 피력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시나리오에 대한 신화는 나에게 아주 오랫동안 작용을 했다. 처음 작품으로 시도한 [반지의 제왕] 작가인 톨킨 J.R.R.Tolkien의 단편 하나를 각색을 할 때 시나리오를 먼저 쓰고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뭔가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혼자 작업실에 처박혀 작업을 하며 자부했다. 마침 그때 세상을 떠들섞하게 했던 피터잭슨의 [반지의 제왕] trology 감독판 뒤에 영화제작과정을 담은 제작판은 칼아트에서 주지 못한 것을 더 많이 주었다.
톨킨의 단편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면서 늘은 것은 사실 영어였다. 톨킨의 대작 [반지의 제왕]을 읽고, 그것이 각색되는 과정을 피터잭슨의 [반지의 제왕]에서 구석구석 살피면서, 내 것에도 그대로 따라 해 본 것이다. 영화판 [반지의 제왕]에서 고문 냄새나는 톨킨의 영어풍이 어떻게 현대 영어로 바뀌었는지부터 어떤 부분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어떤 부분을 창의적으로 바꾸었는지 연구하며 그대로 따라서 영어로 표현해 보려고 애썼다. 어쩌면 나는 이 과정을 더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을 거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놓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들이 어떻게 그림으로 바뀌었는지까지 다 배워야 했다. 이렇게 시나리오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결국 전 과정이 글을 시각화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 완성하지 못했다)
이 신화를 벗어난 것은 졸업을 하고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것은 2013년 CJ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포럼에서 했던 한국의 봉준호 감독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CEO인 카젠버그 씨의 대담으로 깨끗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커젠버그씨는 [라이언 킹] 제작즈음에 디즈니사를 그만둔 전직 디즈니 CEO였다. 이날 대담에서 그가 설명한 것들은 모두 디즈니 애니메이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것을 기반으로 드림웍스의 새로운 스타일을 담아낸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쿵후팬더][슈렉][공룡길들이기]등이다.
그런 카젠버그씨에게 봉준호 감독은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스토리 부서를 운영하시길래 매번 성공을 할 수 있나요? 카젠버그 씨의 대답은 이러했다:
"보통 스크립을 먼저 쓰고, (그것을) 촬영한 후, 편집하죠. -- 이것이 대부분의 영화가 망하는 이유입니다."
글의 시각화를 한 줄로 요약한 말이다. 글의 시각화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한마디로 찝어준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것은 내가 글전통에 그만큼 젖어있던 탓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글로 학문을 오래 한 탓도 있었다. 또한 글전통이 강한 한국의 문화적 배경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했다. 이 뿌리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글이 필요 없던 디즈니 전통과 부딪히면서 여실히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디즈니는 무엇으로 이야기를 만든단 말인가? 내가 칼아트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기니까 다음에서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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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