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내 마음의 비밀번호는_》

실패한 맛들, 하지만 성공한 하루

by 사막의 소금

1. 파타야의 햇빛은 너무 강하다

20분 거리에 있다는 유명 마사지샵은,평소에 1,2시간은 습관적으로 걸어 다니는 나에게 금방이니 우습게 보였는데, 도로 위의 열기는 마치 살을 녹아내리게 하는 듯했다. 그늘 하나 없어 가릴 곳 없는 더위는 20분이 아니라 2시간보다 더 긴 거리로 느껴지게 했다.


도착하니 예약제로 운영되는 마사지샵은 이미 꽉 찬 상태였다. 당일 예약은 안된다는 차가운 말만 돌아왔다. 잠깐 스친 에어컨의 바람보다 다시 뙤약볕으로 나가라는 말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유독 편의점 하나 없는 거리라 어디 더위를 피해 쉴 곳도, 잠시 앉아있을 곳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억울해 온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패기에서였는지, 여행 초반에 얻어온 너덜너덜한 파타야 지도를 들고선 근처 빅씨라는 큰 마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파타야 전체 지역을 손바닥보다도 작게 축소시켜 놓은 그 지도의 조그만 2cm가, 나에겐 2시간짜리 오기로 번역될 줄은 몰랐다.


2. 더 이상 멈출 수가 없어서 걷고 또 걸었다.

가는 길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영어를 하지 못했고, 나는 태국어를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사왔디카‘라는 인사말도 모르는 태국어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앵무새처럼 “빅씨”라는 말만 외치며 겨우겨우 찾아간 빅씨 파타야 남부점. 내 숙소가 파타야 북부에 위치해 있으니, 북에서 남쪽으로 간 것이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에 도착한 빅씨.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눈이 떠지는 듯하다. 이제 무얼 먹고, 또 어떻게 숙소로 돌아갈까 한참을 둘러보는데 한 과일 무더기 앞에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봉투를 들고 와 한가득, 가득가득 담아낸다. 촘촘하게 박힌 가시가 선인장 같기도 하고, 뱀무늬 같은 표면이 영 과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드러난 속살은 분명 과일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손짓과 영어를 섞어가며 이 과일이 맛있냐 물었더니 한 아저씨가 손수 하나를 뜯어 까주신다. 팔고 있는 과일을 계산도 하지 않고 까주시니 너무 놀라 손사래를 쳤더니, 괜찮다며 자기 입에 하나 넣고 다시 큰 놈으로 잡아 까 건네 주신다. 물론, 그 맛은 뭐랄까_ 상한 요구르트에 두리안 냄새를 섞은 느낌. 좋게 말하면 독특했고, 솔직히 말하면 다시는 못 먹을 맛이었다, 하지만 그 환한 웃음과 친절이 좋아서 나도 봉지에 한 덩이 조심스레 담아봤다.


그리고 조용히 그 아저씨를 따라 맛있는 과일을 더 사고 싶다고 말했더니또 다른 과일 하나를 추천해 주셨다. 확신의 엄지를 치켜세우며 자기 카트에 하나, 내 카트에 하나. 당시 고수도, 향신료도 먹지 못해서 음식점에서 매번 식사를 실패하던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코코넛 요거트와 함께 아저씨가 추천해 준 과일들을 잔뜩 들고 마트를 나섰다. 마트를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너무 고생스럽고 지쳐 내가 여길 와서 뭘 하고 있는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억울하기까지 했는데 나서는 길은 괜스레 마음이 가볍고, 돌아가는 길이 즐겁게까지 느껴졌다.


그날 숙소로 돌아와 문을 여는데, 순식간에 무언가 아주 거대한 것이 침대 곁을 재빠르게 지나갔다. 너무 놀라서 확인해 보니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침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놀래서 리셉션에 전화해 “헬프미!!!!!! 플리즈!!!!”라고 얼마나 애원했던지, “버그!!! 코크로치가 나타났다고!!!! 제발!! 도와달라고!!!”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전화를 받으신 분은 얼마나 더 놀라셨을까…조금 부끄러워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에서 항상 친근하게 인사해 주시던 안내원 아저씨가 방으로 들어오셨고, 울부짖으며 아저씨 뒤로 숨는 나를 따뜻한 미소로 안심시키시더니 바퀴벌레를 잡아 창문을 열어 날려주셨다. 아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안전하게_ 그 행동에 놀라서 나는, 발로 세게 짓이기는 행동을 보여주며 물었다. 죽이지 않고 어떻게 그냥 날려 보낼 수 있냐고. 아저씨는 여전히 선한 미소만 짓고 계셨고, 그렇게 바퀴벌레 소동은 지나갔다.


침대 이곳저곳을 구석구석 뒤진 뒤에야 마음이 좀 가라앉았고, 가만히 앉아 요거트와 과일들을 하나 둘 까먹었다. 생각해 보니 이 나라의 대부분은 불교를 믿고, 그들의 생각과 문화가 조금 이해되었다.



여전히 태국인들에게 인기있는 과일 살락(스네이크프루츠)

이런 경험들이, 내 마음의 비밀번호를 열게 했었던 것 같다. 추천받아서 갔던 고급 마사지샵이 아니라, 미슐랭에서 인정받은 유명 음식점이 아니라, 낯선 이에게도 자기에게 좋은 것들을 거리낌 없이 나눠주고 알려주는 모습,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들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들. 이상하게도 이 날의 기억들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생생히 남아있다. 물론 그날의 2cm가 입힌 화상이 여전히 어깨에 남아있고, 아저씨가 추천해 준 과일 쌀락(snake fruit)과 타마린드는 결국 입에 맞지 않아서 다음날 바퀴벌레를 잡아주신 아저씨께 전부 드렸지만.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자기가 이걸 정말 먹어도 되냐고, 주는 거냐고 재차 물어보시는 그 맑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이렇게 태국 사람들이 가진 때 묻지 않은 선함, 이것이 단 하루 만에 내 마음을 열어버린, 비밀번호였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