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치해진 어느 날의 기록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책상 한쪽 구석에 넣어둔 상자를 뒤적인다. ‘바스락바스락’ 짜투리 종이와 이면지들을 담아둔 재사용 박스에서 나름 통일감 있는 종이들을 골라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잠시 잊고 지내던 공간에서 다시 글씨를 쓰기 위해 준비를 하는 중이다.
4년 전. 100명이 넘게 모여있는 단톡방. 넘사벽의 작가님들이 모여있는 그곳에 영문캘리그라피를 시작한 지 1년 남짓한 비기너가 입장을 했다. 매일 올라오는 퀄리티 높은 글씨들에 눈은 점점 정수리로 올라가고 조잡스러운 나의 글씨에 현자타임은 자동옵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너를 환영해 주는 어드밴쳐들의 응원에 의지를 불태웠고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5일. 목요일까지는 영단어 쓰기를 하고 금요일엔 영어명언 쓰기로 그들의 리그에 발을 들였다.
대도시의 야경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글씨들 속에서 시골 소녀의 흰 블라우스와 검정스커트의 교복 느낌 나는 글씨는 지루해 보였다. 아니 지루하다 못해 비루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더 무던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시선이 화려한 곳으로 쏠릴 테니 흑백의 글씨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달까.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쌓여갔다. 무더운 여름에 시작된 챌린지는 두 번의 계절이 바뀌도록 이어졌다.(사실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어드밴쳐들 눈에 매일 똑같은 패턴의 글씨를 하루도 쉬지 않고 올리는 비기너가 많이 기특했는지 응원의 말들과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네주었다.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에너지를 다 받은 기분이었다.
캘예인(캘리그라피계의 연예인)이라고 불리우는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밤을 새워 글씨를 쓸 힘을 얻었다. 유치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좋은 종이를 구입하고 예쁘게 커팅을 해 놓고 배운 대로 기교는 1도 없는 글씨를 쓰는 일.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썼고 결국 그들의 리그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비기너가 아니라며 어드밴쳐 이상 신청 가능한 워크숍 정보를 공유해 주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날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잠을 안 자도 졸리지 않고 끼니를 놓쳐도 배고픈 줄 모르고 글씨를 쓰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어드밴쳐로 바라보는 수강생분들과 인친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쁘고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는 이유로 톡방에서 함께 쓰는 글씨를 놓은 지 1년도 넘었다. 그때의 그 열정이 그리웠던 걸까? 마음이 분주해지면 늘 초심을 생각한다. 주섬주섬 종이를 자르고 마음을 정돈하면서 초심을 다시 새겨야 할 타이밍이다. 새해가 시작되고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이루고 싶은 욕망 앞에서 순수했던 과거의 나를 소환해 본다. 오롯이 자아실현을 위해 글씨를 쓰던 그때의 그 감정을 말이다. 덕업일치의 삶.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자발적으로 퇴근 없는 인생을 사는 지금. 나는 행복한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행복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조금은 힘들다. 행복하다고 해서 하는 일이 쉽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다만 어렵고 힘듦은 성장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괴롭지는 않다. 덕업일치의 삶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매 순간 고민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하지만 괴로움보다는 행복함이. 포기보다는 'AGAIN'을 외칠 수 있는 마음가짐.
오늘도 다시 펜을 든다.
처음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