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답장이 왔다
"그래. 너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그렇게 할게"
의외다. 이렇게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니...
남편은 어제 과음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오후 반차를 내고 퇴근할 예정이라고 했다.
오후 5시.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밖을 나서는데 정문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다면서... 집에서 쉬지 왜 왔어"
"너 요즘 너무 못 먹어서. 한식당이라도 가보자. 막상 가서 음식들 보면 먹고 싶은 거 있을 수도 있잖아"
"어제도 태국 레스토랑 혼자 갔는데 결국 못 먹고 나왔어. 못 먹을 거야 아마...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려고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아"
"걸을 수 있어? 그럼 좀 걷다가 먹고 싶은 거 보이면 그거 먹자"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일단은 걸었다.
입덧으로 예민해진 후각은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를 가장 못 견뎌했는데 그가 손수건을 챙겨 와 필요할 때마다 코를 막았다.
"오빠... 무섭지 않아?"
"뭐가?"
"그 여자 남편한테 알리는 거..."
"안 무서워. 설령 걔 남편이 폭력을 쓴다 해도 맞고 있을 거야. 부모님한테 욕먹는 것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도 다 괜찮아. 너를 잃는 게 나한테 가장 두려운 일이고 나머진 뭐가 되든 다 내가 감당해야 될 일이라 생각해"
걷다 보니 밀레니엄 브릿지가 보였다.
"건너서 테이트 모던까지 갈까? 우리 처음 만났던 나 아르바이트했던 프렛 가보는 거 어때?"
"응... 거기 야외 테이블 있었지? 나 안에는 못 들어갈 것 같고, 밖에서 뭐 좀 먹자 그럼"
"처음 너 만난 날, 문 열고 들어왔을 때 보자마자 기도했었다. '제발 한국인이길, 제발 관광객 아닌 유학생이길...' 그러고 나서 네가 카페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또 기도했어. '제발 남자 친구 없길, 제발 데이트 신청받아주길'..."
"오빠는 그런 사소하고 가벼운 것들도 기도해? "
"그게 왜 사소한 거야? 첫눈에 반한 상대를 만난 건데... "
"그럼 기도 응답을 받은 건데... 그런데... 왜 그랬어."
그의 외도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미안해... 내가 미친놈이라서. 정신병자인가 봐.... 평생 사과하며 살게"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이 과장님이 이번 주에 댁으로 초대하셨어. 형수님도 심한 입덧으로 많이 고생해서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너랑 꼭 같이 오래. 형수님이 맛있는 거 해주신대"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다. 회사 바비큐 파티와 연말 파티 등 모임 자리에서 몇 번 뵀었는데 어색해서 얼어있는 나를 잘 챙겨주시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우리 간다고 준비 많이 하실 텐데.. 하나도 못 먹으면 너무 죄송스러울 것 같은데.. 입덧 좀 잠잠해지면 가면 안 될까?"
"그 얘기도 했는데, 일단은 와보라고 하셔서..."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우리의 만남이 이뤄진 그곳에 와있었다.
그가 나를 야외 테이블에 앉힌 후 슬쩍 매장 안을 보더니 자기가 아는 사람이 오늘은 한 명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주문한 음식을 담아 온 쟁반엔 수프, 치킨 랩, 머핀, 쿠키, 샌드위치 그리고 음료로는 커피, 탄산수, 사과 주스가 놓여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한 입만 먹고 버리더라도 먹어봐"
그가 얘기한 것처럼 조금씩 맛을 봤다. 그중에 치킨 랩이 역하지 않고 잘 넘어가서 반을 먹었다.
"데이비드가 그러는데 너 점심때 주스 한 병 마시고 엎드려 있었다며..."
"응...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치킨 랩 내가 아침마다 싸줄게."
"아니야. 지금은 괜찮았지만 내일부터 못 먹을 수도 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원망과 아픔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힘들었다.
그는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고는 호텔에 있는 내 짐을 챙겨 오고, 장을 봐오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의 회사 노트북이 켜진 채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았다.
뭔가를 더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또 다른 충격적인 내용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할 에너지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한 후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남편이 이미 돌아와 다음 날 입을 셔츠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오빠 씻어. 내가 할게"
"아니야. 너는 얼른 쉬어. 오늘 많이 걸어서 더 이상 무리하면 안 돼"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힌 후 티브이를 틀어주고는 다림질을 마무리 한 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내가 그의 노트북을 열지 않았더라면... 그가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다 정리했더라면...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랬다면 우린 계속 행복하게 살았을까... 생각을 비우려고 해도 꼬리를 문다.
함께 티비를 보다 잘 시간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옆에 누운 그가 물었다.
"안아주고 싶어. 안으면 안 되지?"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안기고 싶었다.
"안아줘..."
그의 품이 좋았다... 동시에 그 여자도 이 품에 안겨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슬펐다.
"정말 미안해." 그가 속삭였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가 토르티야로 치킨랩을 만들어, 과일까지 함께 챙겨 놓았다.
"너무 고마워. 그런데 오빠도 피곤한데 너무 애쓰지 마"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인데... 진짜 왜 그랬어... 고마운 마음 뒤엔 여지없이 원망도 함께 올라왔다.
출근해서 급한 업무부터 처리하고 얼그레이 티를 마시고 있는데 데이비드가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기분은 어제보다 괜찮니?"
"응. 너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적어도 그를 여전히 좋아하는 나를 자책하는 마음이 약해졌어. 억지로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
"이것만 기억해, 결정권자는 너야. 헤어질지, 용서할지 모든 건 네 선택이야. 남편은 그저 네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조급해하지 마..
네 건강, 아기, 일, 취미 등 너를 위한 것들에 마음을 써봐. 그렇게 지내다 보면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고, 가장 편안한 길을 찾아가면 돼"
“그런데 내가 용서를 하고 겨우 극복하고 살았는데 나중에 그가 또 외도를 한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잖아. 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좋은 사람이고, 그걸 저버린 건 그 사람의 문제야. 그런 일이 또 생긴다고 해도 ‘그때 헤어지지 않아서 또 당했다’며 자신을 탓하지 마. 넌 그저 선한 피해자일 뿐이야.”
“데이비드... 넌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깊이 있는 말을 해? 너무 위로가 돼.”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난 게이잖아. 게이들의 연애는 더 복잡하고 어려워.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매일 눈물로 살아야 하거든. 20대 초반에 난 매일 울었어”
그가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고, 난 웃음이 터졌다.
데이비드가 웃는 나를 보며
"너 웃는 거 엄청 예뻐. 물론 세상에 너와 네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남는다면 넌 나의 라이벌일 뿐이지만... "
그는 끝까지 농담으로 나를 웃겨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 남편이 만들어 준 치킨 랩을 먹었다.
스위트 칠리소스와 할라피뇨가 들어가 느글거림을 잡아줘서 잘 먹을 수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점심 도시락 고마워. 오늘 안 남기고 다 먹었어. 맛있다"
"와... 다 먹었어? 뭐라도 먹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너 쓰러질까 봐 너무 걱정이었어. 이따가 퇴근하고 맛있는 거 해줄게. 알려줘서 고마워."
전화를 끊고 산책을 조금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퇴근하기 전 개인 이메일을 열었더니 어머님에게 메일이 와있다.
임신했는데 얼마나 충격이 크겠냐며 걱정으로 시작한 메일은
'남편 너무 잡도리하면 다시 돌아오려다가도 바람피운 여자한테 가버린단다. 이럴 때일수록 남편을 더욱 잘 섬기는 게 지혜로운 거란 걸 잊지 말아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당신의 아들 구박받을까 걱정되어 메일 주신 거였다.
답장을 쓰려고 했으나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만 허공에 맴돌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퇴근 후 집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영상통화가 왔다. 얼굴을 보더니 너무 많이 상했다며 밥은 잘 먹는지, 남편이 잘해주는지 물었다.
"응 도시락도 싸주고, 집안일도 다 하고, 너무 잘 챙겨주고 있어. 그러니까 엄마 걱정하지 마"
엄마는 자상한 남편 만난 것도 내 복이라며 좋아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또 다시 현실이 자각되며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내 가족만 모르면 난 괜찮다...
남편이 퇴근해서는 요리하는 동안 방에서 문 닫고 쉬라고 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누워있다가 주방으로 갔더니 닭다리 살을 넣은 파스타와 가지구이, 샐러드를 해놨다.
닭고기만 괜찮고 다른 건 먹기가 힘들었다.
남편이 "잘 먹어야 하는데 걱정이네. 얼른 입덧 멈추면 좋겠다" 라며 안타까워했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이 치우기 위해 일어났다.
"오빠 얼른 씻어. 입덧 때문에 요리하는 것만 힘들지 다른 일들은 다 할 수 있어. "
정리를 마치고 빌린 책 반납일이 다가오고 있어, 읽다 멈췄던 책을 다시 펼쳤다
씻고 나온 남편이 누워보라더니 발마사지를 해주면서 말을 꺼냈다.
"걔 남편한테도 알려야 한다고 말했어"
"뭐래?"
"너랑 만나서 얘기를 해보고 싶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고, 또 너도 직접 얼굴 보고 따지고 싶은 게 있지 않겠냐고 하던데..."
"만나고 싶지 않아. 물어볼 것도, 따질 것도 없어. 만나면 스트레스만 받을 것 같고, 삼자대면 할 기운도 없어. 지금은... 내가 원하는 건 그 여자 남편도 아는 것뿐이라고 해줘."
"... 그래. 알았어"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내가 두통 때문에 계속 힘들어하자 그가 머리부터 목 어깨 등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물어보지 않고 나를 안았다.
그의 팔을 베고, 그의 허리에 내 팔을 감고 그의 목덜미에 내 코를 대고 안겨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주말이 되어 초대받은 이 과장님 댁에 갔다.
식탁이 가득하게 차린 음식을 보자마자 그 정성과 노력이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울컥 나왔다.
"너무 감동이네요. 이거 다 준비하느라 종일 서서 요리하시고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내가 울먹거리며 얘기를 하자 과장님의 아내분이 나를 살며시 안아주며 말했다.
"입덧하느라 힘들죠? 저도 너무 고생해서 알아요. 먹을 수 있는 것만 조금씩 먹어봐요. 아예 안 먹는 거랑 조금이라도 먹는 거는 또 다르더라고"
김치까지 다 새로 담가서 열심히 먹어보고 싶었으나 그날 삼킬 수 있는 건 충무김밥뿐이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제대로 못 먹었던 남편이라도 맛있게 잘 먹어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은 와인을 마셨는데, 다들 와인에 대해 지식이 많아서 대화를 듣고 있는 게 즐거웠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이 설거지를 본인이 하겠다고 고집부려서 결국 그가 하게 되었고, 아내분은 우리에게 싸줄 음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난 과장님 댁 가든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머그잔에 커피를 들고 과장님이 다가오셨다.
"얘기 다 들었어요"
"네? 어떤..."
"저 자식이 죽을죄 지었잖아요"
"아..."
모르는 줄 알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정하게 굴었던 순간이 떠올라 조금 민망했다. 동시에 아무리 많이 의지하고 존경하는 상사여도 굳이 이런 얘기까지 다 털어놨을까 싶었다.
"화요일에 출근했는데 정신 나간 놈처럼 있길래 데리고 나가서 물었더니 다 얘기하더라고요. 너무 미안하고 수치스러워서 딱 죽고 싶은데, 자기가 죽으면 가해자랑 피해자가 바뀔까 봐 그러지도 못한다고... 그냥 성질날 때마다 뒤통수 세게 퍽 치고, 소리도 지르면서 조금만 더 데리고 살아봐요. "
"아... 네..." 어색하게 대답했다.
" 저 미국에서 유학할 때 파티에 가면 가끔 대마초 피웠었거든요. 그러다가 점점 집에서도 피웠는데, 나는 항상 싸구려 대마초 구해서 하니까 환각 효과가 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셨다가 방에서 대마초를 발견해서 날 보자마자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 그때 알았어요. 대마초를 좋아서 피운 게 아니고 평생 처음 해보는 일탈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걸. 한국에선 불법인데 거기에선 자유롭게 한다는 이상한 쾌감...그 뒤로 다시는 안 했어요. 부모님한테 너무 죄송하고 면목없어서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더라고요.
본인의 일탈 경험까지 얘기를 해주시는 게 고마웠다.
"네... 얘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남편이 말했던 '금지된 관계에서 오는 새로운 자극'이었단 표현이 조금 이해가 가요"
"저 자식 만에 하나 또 그러면 저한테 연락해요. 그땐 제 손으로 죽여놓을 테니까"
데이비드도 그렇고 이분도 그렇고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운전하고 있는데 보조석에 앉은 그가 누군가와 열심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점점 누군인지 궁금하고 거슬렸다.
"오빠 누구랑 메시지 해?"
"아... 걔 회사 그만 둔대."
그 여자가 다음 날 출근하면 사직서를 올릴 것이며, 4주 노티스인데 남은 휴가가 2주 정도 있어서 실제 출근은 2주만 하고 떠난다고 했다.
"오빠 혹시 미안해? 오빠 때문에 그 여자가 직장을 잃는 것 같아서?"
"아니. 사실 한 공간에서 일하는데 너무 불편하고 껄끄러워서 내가 회사를 옮길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나가준다니.. 나로선 다행이지."
집에 와서 남편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주는데 그 여자의 마지막 강력한 욕설 메시지에서 이 둘은 영원히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Fuck off you idio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