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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변했다. 그리고 나도...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착한 건 멍청한 거지

by 티타임 스토리

나는 그의 외도를 묻었다.


그것은 그를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와 다시 잘 살아볼 결심을 한 이상 자꾸 끄집어내어 나에게 생채기를 더 이상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도 모르게 원망과 미움이 마음속에 불쑥 찾아오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그를 위해 그런 마음들은 잠재우고 다스렸다.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으니까...


출산 전 그동안 정들었던 얼스코트에서 킹스턴의 투 베드 플랏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값이 비싸긴 했지만 한인타운도 가깝고 동네도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2008년 5월...


예정일이 2주나 지났지만 출산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 결국 유도분만을 하기로 했다.


촉진제를 맞고 병원복도를 걷고 욕조에 들어가기도 하며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24시간이 지나도록 진행이 되지 않았다.


결국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되고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덤덤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후에 물어보니 수술로 나와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계속 눈물이 났다고 했다.


하반신만 마취한 상태라 수술 과정부터 후처리까지 의식이 온전히 깨어 있었는데, 몸이 들썩 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미드와이프가 제왕절개로 낳은 아이를 깨끗이 닦아주고는 옷과 모자까지 잘 씌워서 남편에게 안겨주었다.


작은 아이를 어설프지만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아직은 어린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아이 부모로서의 동지애 그리고 당분간은 홀로 나와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가 느껴져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여러 이유로 모유수유를 실패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시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연분만도 못 한 주제에 모유수유도 못 하고..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첫 단계부터 망해서 어쩌냐... 지혜로운 어미, 돕는 베필이 되라고 그렇게 기도했건만... 쯧쯧 "


절대 적응이 되지 않는 시어머니의 막말은 이미 곪아 있는 상처를 계속해서 후벼 팠다.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엄마가 3주 동안 영국으로 오셨는데, 남편이 퇴근하면 장모님은 쉬시라며 젖병 소독부터 설거지, 아이 옷 손빨래, 수건 삶기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했다. 엄마는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때부터 많은 일을 하게 될 테니 있는 동안은 아이 목욕만 도와달라고 했음에도 그는 장모님이 관광도 제대로 못 하고 집에서 일만 하는 게 죄송하다며 퇴근 후에는 엄마가 아무것도 못 하게 했다.


그런 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이렇게 착하고 배려 깊은 그를 잃었다면 분명 후회했을 거라며, 바로 이혼을 진행하지 않았던 나의 결정을 칭찬했다.


막상 아이를 낳아보니 외국에서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아이가 100일이 지나자 시부모님은 멀리 떨어져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손녀가 만났을 때 어색해하면 안 된다고 평일에 매일 영국시간 오후 1시면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거셨다.


두 분 다 은퇴도 하셨고 한국은 밤 9시라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시간이지만, 나에게 오후 1시는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아이가 잠이 들었다면 집안일도 해놓고, 점심을 먹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다녀올 수도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며칠만 하게 될 줄 알고 시작된 영상통화를 아이가 7개월이 될 때까지 매일 하게 되었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오후 1시에 노트북 앞에 아이를 안고 앉아서, 전날 저녁 메뉴를 뭘로 해서 남편을 먹였는지, 주일에 목사님 설교는 어땠는지, 분유값, 식비, 생활비 등은 얼마나 나가는지 등 생활의 모든 것을 물어보셨고, 나중에는 매일 가계부까지 작성해서 통화할 때마다 보여달라고 하셨다. 또 어느 날은 카메라 앞에서 이유식을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달라고 하시기도 했다.


아이가 6개월이 넘으면서부터는 기어 다니기 시작해서 오래 안겨 있는 것을 불편해했는데, 그럴 경우 아이는 기어 다니게 두고 나만 홀로 노트북 앞에 앉아서 1시간의 영상통화를 마치게 했다.


통화를 끊고 나면 오늘의 과제가 끝났다는 기쁨이 아닌, 내일 또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어느 날부터 오후 12시 정도만 되면 온몸에 미세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떨리고 어지러웠다.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고, 그럴 때마다 숨을 아주 얕게 들이마시며 같은 자리를 빙빙 돌며 걸어야 했다. (당시엔 이게 공황장애 증상인 줄도 몰랐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다는 판단에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오빠. 나 매일 1시간씩 영상통화 하는 거 너무 힘들어. 매일 어머님의 간섭에, 잔소리에 멀리 살고 있어도 시집살이하는 거 같아. 주말에 하루만 하면 안 될까? 오빠도 없이 나 혼자 매일 애기 데리고 영상통화하는 거 정말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아."


나는 당연히 그가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그는 늘 내 입장을 우선시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절망케 했다.


"엄마, 아버지 은퇴하시고 손녀 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그렇게 어려워? 조금만 더 해줘. 어차피 너 복직하면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


그는 내가 희생하고 배려한 시간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고 있었으며, 나를 은퇴한 시부모님의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으려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 잘못이다...참았으면 안 됐다. 힘들 때마다 표현을 했어야 했다. 내가 힘들지만 참고 있다는 걸 알아줄 거라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그는 내가 티 내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봐 주던 사람이었는데 예상치 못 한 그의 반응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난 정말 참다 참다 얘기한 건데 오빠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너무 섭섭하다. 그럼 오빠도 이제 주말마다 애기 데리고 우리 엄마, 아빠랑 1시간씩 영상통화해. 그동안 나는 나가있을 거야."


"... 그렇게 싫으면 하지마. 엄마, 아버지한테 주말만 하자고 할게"


"어머님이랑 아버님은 낮에 취미 활동 다니시잖아. 아버님은 사진, 등산 동호회 다니시고, 어머님은 악기 배우고 요가 다니고... 그런데 나는 매일 가장 활동 많은 시간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해."


"알았으니까 그만해"


짜증스러운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그가 변한 걸까...


그날 이후 평일에 매일 하던 영상통화 지옥에서 벗어났지만, 내가 몇 달만 더 했으면 되는 것을 포기해서 남편과 시부모님을 실망하게 한건 아닐까 하는 또 다른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왜 저들은 적당함이라는 게 없을까.
왜 경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침범하면서, 그걸 막으려 하면 오히려 화를 낼까.
그리고 나는 왜 나만의 바운더리가 없어질 때까지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할까...


2009년 1월...


남편이 싸이월드에 아이 사진을 올렸는데 남편 회사 여직원의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대리님 저도 킹스턴 사는데 왜 00만 태워줘요~'


물어보니 같은 동네에 여직원 두 명이 사는데 그중에 한 명과 카풀을 하고 있다고 했다.


카풀을 하는 여직원은 나보다 한 살 어린 미혼이었고, 위의 댓글을 쓴 여직원은 남편과 동갑이고 독일인과 결혼한 유부녀였다.


"오빠... 둘 다 태워서 다니던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카풀하지 마."


"왜? 질투하냐?‘


그가 ‘냐’로 끝나는 말을 했다. 처음이었다.


"오빠...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난 지금 분명히 하지 말라고 얘기했어.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 이 문제로 더이상 얘기는 안 할건데, 앞으로도 카풀 계속하면 그때는 나를 무시하는 걸로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그는 내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고, 카풀하는 문제로 다툴 때마다 나를 질투에 눈이 멀어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못난 여자 취급을 했다.


평생 연애하며 살자 했었는데, 우리에게 권태기는 없을 거라 했었는데, 우리 부부는 특별하다 생각했었는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단단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벽이 이제야 조금씩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009년 5월, 출산휴가 52주를 다 채워 복직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 다시 출근하게 되어 좋겠다며 다들 얘기했지만 난 아직 한 살밖에 안된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불안했다. 복직을 일주일 앞두고는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이를 맡길 곳은 교회의 집사님 댁이었는데, 남편분은 학위 때문에 외국에 거주 중이셨고, 초등학생 여자 아이를 한 명 키우며 사시는 분이었다. 성품이 좋으시고 차분한 분이라 우리 아이도 잘 돌봐줄 것은 의심치 않았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아이는 나와 떨어질 때마다 대성통곡을 했고, 퇴근 후 데리러 갔을 때 서러워하며 안기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남편은 아직 복직은 이른 것 같다며 회사를 그만두는 게 어떤지 물었고, 나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셋째 날 아침, 아이가 집사님을 보자 팔을 벌려 안겼다. 내가 헤어짐의 인사하자 울긴 했지만, 퇴근 후 데리러 갔을 땐 방긋 웃으며 나에게 안겼다.


넷째 날부터는 웃으며 헤어지고, 웃으며 만났다. 그제야 회사에서 온전히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되었다.


우리 회사는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다양한 와인, 맥주, 보드카, 샴페인을 제공하고, 여름에는 모히또도 준비해 전 직원에게 알콜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이는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금요일에는 업무를 더 일찍 자유롭게 마무리하자는 회사 복지 중 하나였다.


그러다 마케팅 전략팀의 신입인 샘이라는 직원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의 부모님이 킹스턴에 살고 있어서 금요일마다 방문한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매주 금요일일이면 함께 퇴근하게 되었다.


그는 SOAS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는데, 교환학생으로 한국에가서 공부도 하고, 한국인 여자친구도 사귄 경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대화 소재가 많았다.


어느 날 남편과 벤톨 쇼핑센터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일찍 퇴근한 남편이 아이를 챙겨 약속장소에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샘과 함께 걸어오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남편과 샘을 서로 소개해주었고, 인사를 한 뒤 샘과는 헤어졌다.


남편이 툴툴대며 내게 물었다.


"쟤는 뭔데 같이 와?"


"부모님 이 동네 사셔서 금요일마다 같이 와"


"꼭 같이 올 필요 없잖아. 따로 오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그럼 퇴근 시간도 같고 오는 길도 똑같은데 굳이 피해서 따로 와야 해?"


"넌 키 큰 금발 백인이면 환장하더라?"


"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막말은 하지 말자 좀..."


"너 애도 있는 유부녀아. 행동 조심해. 같이 다니지 마 앞으로"


"왜? 질투나?? 오빠도 00이랑 카풀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하고 있잖아. 나도 계속할 거야"


"하아.. 진짜... 알았어, 나도 카풀 안 할게. 너도 저 새끼랑 그만 다녀"


"싫어. 카풀하는 거 알고나서 내가 지금까지 5개월 넘게 그만하라고 하고 있는데 계속 무시했잖아. 나도 오빠가 카풀 끊은 날부터 정확히 5개월은 더 쟤랑 다닐 거야""


"야 너 나한테 무슨 억한 심정 있어? 왜 그래? 너 착했잖아"


"아니 멍청했던 거지. 자기를 존중해주지도 않는 사람한테까지 착하게 구는 건 멍청한 거야."


"너 왜 이렇게 변했냐?"


"그놈의 '냐'로 끝나는 말투부터 고쳐. 변한 건 오빠가 먼저잖아. 그리고 어머님의 막말도 더이상 듣고만 있지 않을 거야. 내가 지금까지 참았던 건 그래도 오빠가 나를 이해해 주고 보호하려 했기 때문인데, 이제는 오빠까지 나를 무시하니까 참을 이유가 없어졌어."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처음으로 다 쏟아낸 날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만 유지되던 관계는, 그 사람이 더 이상 희생을 거부했을 때 오히려 그가 나쁜 사람으로 몰린다. 착했었는데 변한 사람 or 원래 나빴는데 착한 척했던 사람으로...


그가 그랬듯, 나도 변했다.
Enough is enough.

누군가 물었던 적이 있다. 만약 현재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과거로 돌아가서 남편을 만난다면 또 사귈 것인지... 고민은 되었지만 내 대답은 yes였다.


그가 내 런던 생활에 동기를 부여해 주고, 목표를 구체화시켜 주었으며, 다양하고 행복한 경험을 쌓게 해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뜨겁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반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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