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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편도 알아야해

by 티타임 스토리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호텔방의 침대에 누웠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슬픔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임신을 한 상태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의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9월부터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변경되었는데, 몇 년간의 파트타임 경력도 인정받아 연봉도 남편보다 조금 더 높아서 혼자서 생활하기에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은 무조건 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두고 선택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1. 출산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가 끝날 때까지 1년 정도를 친정엄마와 함께 지내다가 영국으로 돌아온다.


2. 지금 당장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싱글맘으로 살며, 새롭게 직장부터 구한다.


3. 친정부모님께는 남편과의 이혼을 당장 알리지 않고, 영국에서 생활을 하며 홀로 출산과 아이를 키우며 살다가 나중에 알린다.


1번 2번은 부모님께 엄청난 상처와 근심을 줄 것이고, 3번은 내 삶이 고립될 것 같아 두려웠다.


무엇을 택하더라도 많은 고통이 따를 것임이 느껴졌다.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따를게요.
저에게 솔루션을 주세요...



그제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구보다 나를 가장 사랑해 줄 것 같았던 그가 왜 그랬을까... 아까 보았던 이메일 내용들을 곱씹다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몇 달 전부터 자려고 누우면, 잠들었다가 못 깨어나고 죽어있을 거란 두려움에 떨며 잠드는 날이 많았는데, 그날은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자다가 죽으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내 마음속에 분노와 원망 그리고 근심의 파도가 수 백번, 수 천 번 일어났다.


헤어져야 한다고, 이혼은 무조건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커다란 슬픔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슬픔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까 봐 남편과 그녀가 주고받은 사진과 이메일을 다시 열어서 보다가도, 그가 내게 했던 따뜻한 말들, 손길, 배려, 함께 한 시간과 추억들이 떠올라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만약 내가 그를 용서하고 살게 되면 앞으로는 끊임없이 그를 의심하고, 동시에 의심하고 있는 나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 것이란 것을... 그리고 그건 내 영혼을 갉아먹는 삶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더니 두통으로 울렁거림이 더 심했다.


침대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고 싶었으나, 영국에서 첫 진료를 보는 날이라 준비를 해서 병원으로 갔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다들 남편이나 파트너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속에 홀로 앉아 기다리는 어린 동양 여자가 얼마나 불쌍하게 보일까 싶어서 위축되었다.


초음파를 보는데 심장소리를 들려줬다. 한국에서는 아기집만 보였었는데 2주가 지났다고 더 컸구나... 심장소리가 아주 뚜렷하다며 태아가 잘 성장하고 있다고 하는 말이 안심이 되면서도 현실 앞에 먹먹해졌다.


진료실에서 나왔는데 누가 성큼성큼 다가와 쳐다보니 남편이었다.


원래 병원을 같이 가기로 해서 연차를 미리 내놨는데, 내가 정확한 시간을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가 내 팔목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헤어지는 것만 빼고"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런데 헤어지는 건 당연한 거야. 다시는 예전처럼 못 돌아가. "


"집에 가서 얘기를 하자"


"아냐 오빠. 나 안 들어가."


"그럼 차에서 얘기해. 아니 그냥 들어만 줘. 변명할 생각 없고 왜 그렇게 된 건지만 말해주고 싶어"


"내가 아직 들을 준비가 안 됐어.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게 무서워"


"... 밥은 먹었니? 너 너무 말랐다... "


그 말에 서러움이 한꺼번에 올라와서 울먹이며 소리쳤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인데... "


병원 복도의 난간을 잡고 서서 울었다.


그가 나를 부축해 차에 데려와 태웠다. 시동을 걸어 에어컨을 틀어주고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뒤 스타벅스에서 주스와 디카페인 프라푸치노 한 잔을 사 왔다.


두통과 입덧으로 인한 메슥거림으로 힘들었는데 프라푸치노 한 모금에 조금 살 것 같았다.


"이메일 속에 오빠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 저질인 걸 알았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거야."


"...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너만 사랑했고, 너만 사랑하고, 그 여자와는 절대 사랑이 아니야"


"그렇겠지...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저급하고 더러운 말을 써가며 부르고 표현을 하겠어"


내 말에 그가 차근차근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회식자리에서 그 여직원이 야한 농담을 시작했고, 술 김에 그 농담을 몇 번 받아주다 보니 가끔 외근을 같이 나갈 때 노골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퇴폐적인 대화를 주고받다가, 프랑스로 출장을 갔을 때 술을 마시고 처음 자게 되었고 그 이후 섹스 파트너가 되었다며 그냥 욕정이고 새로운 자극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 내 안에 그런 더럽고 쓰레기 같은 모습이 있을 줄 몰랐는데... 안 그래도 그만두려고 했어. 너 임신한 거 알고는 정말로 멈추려고 했고..."


이건 거짓말이다!


"아니야. 오빠는 우리 집에 그 여자를 불러 둘이 함께 있기 위해서 나를 계획적으로 혼자 한국으로 휴가를 보냈고, 내가 영국으로 돌아온 첫 주일에도 혼자 교회를 보내놓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갔어. 멈출 생각이 없었던 거야."


"네가 듣기에 이해 안 되고, 정신병자 같겠지만 사회적으로 금지된 사이라는 게 스릴도 느껴지고, 그냥 나에게 강렬한 자극을 줬던 거 같아. 그 이상은 절대 아니야"


"오빠는 왜 그렇게 나에게 애기를 갖자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거야? 이메일 보니 이미 그때부터 시작이었던데... 애기를 볼모 삼아서 오빠의 실체를 알았어도 내가 도망 못 가게 하려고 한 거야? 생각해 보면 오빠는 평소에 차분하고 다정하지만 질투심이 생기는 순간이 오면 변태적인 소유욕이 나왔던 것 같아."


"나도 어디까지 갈지 불안했나 봐. 아빠가 되면 끊어내고 원래대로, 네가 아는 내 모습대로만 살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정말 걔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 비겁하고 우습게 들리겠지만 지금 당장 걔한테 전화해서 네가 하라는 욕 그대로 뱉어낼 수도 있어"


"일단 오빠는 집으로 가.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너 지금 어딨는데... 데려다줄게"


"호텔에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리고 내가 연락할 때까지 나한테 먼저 전화하지 마."


그를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핸드폰 벨 소리에 눈을 뜨고 확인하니 옆집에 사는 이웃이자 내 회사 동료인 데이비드다.


아파트 앞에서 남편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 인사하러 갔는데 엄청나게 취해 있고, 그 주변에 담배꽁초가 여러 개 있어서 집까지 겨우 끌고 와서 데려다 놓고 나왔다며 빨리 들어가 보라고 했다.


시간을 보니 저녁 6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남편도 혼자서 아파하고 괴로워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난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니까...


전날 저녁부터 그때까지 한 끼도 안 먹고 아침에 디카페인 커피 몇 모금 마신 게 전부라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았다.


호텔 근처 태국 레스토랑에 가서 볶음밥을 시켰다.


맛있게 먹겠다는 의지와는 달리 두 번 먹으니 속에서 거부했다.


억지로라도 더 먹어보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테스코에 가서 초콜릿, 사과, 주스, 바게트, 비스킷을 샀다.


호텔로 돌아와 비스킷을 베어 물고 아주 조금씩 삼켰다.


'난 혼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한다 '


데이비드가 알려준 남편의 만취 상태가 지금은 어떤지 전화를 해봤다.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적막감이 싫어 티브이를 켜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진주 귀고리 소녀'를 읽기 시작했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30분 뒤쯤 다시 전화를 했다.


여전히 꺼져있었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드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집 벨 좀 눌러달라고 했는데 반응이 없다고 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별일 없을 거야' 수없이 되뇌며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집으로 갔다.


문 앞에는 데이비드가 서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가 욕조 앞에 쓰러져 있었다.


놀란 내가 주자 앉자, 데이비드가 그를 똑바로 눕히고 호흡과 맥박을 체크하더니 괜찮다고 했다.


단지 술에 너무 취해 여기서 잠든 것 같다며 나를 안심 시키고는 그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그가 곧 인상을 쓰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물을 따라 건네주는데 마시지를 못 했다.


나는 데이비드에게 너무 고맙다고 인사한 후 이제부터 내가 챙기겠다고 하고 보냈다.


수건에 물을 적셔 그의 얼굴과 손을 닦아줬다.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나를 꽉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너를 지옥 속에 밀어 넣어서 너무 미안해. 그런데 너 없이는 나 못살아"


"오빠 술 깨고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 일단 술부터 깨고 씻고 자. 내일 출근해야지"


"호텔로 돌아갈 거지?"


"아니 오늘 밤은 여기 있을게"


그를 일으켜서 소파에 앉게 했다.


아까 마시지 못했던 물을 다시 주자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뛰어가 구토를 했다.


토하고 나서는 술이 좀 깼는지 곧이어 샤워를 하고 나왔다.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졌는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정신은 많이 돌아온 듯 보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침대에 가서 자라고 했다.


"너 편하게 자야지. 나랑 눕기 싫은 거 알아. 내가 소파에서 잘게. 어제부터 얼마나 힘들었어... "


맞다. 어제부터 너무 고된 하루를 보내서 심신이 다 지쳐있었다.


"오빠도 그냥 침대에 누워서 자. 우리 내일 둘 다 출근해야 하는데 잘 쉬어야 해"


함께 누워있는데 어색했다.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훌쩍거림으로 서로가 울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새벽 알람소리에 깼다.


내가 먼저 씻고 그를 깨웠다. 옷과 화장품이 다 호텔에 있어 다시 가야 했다.


"오빠 나 호텔에 가서 출근준비 해야 해"


"오늘은 집에 들어와. 나랑 있는 게 힘들면 내가 나갈게. 임신한 네가 왜 밖에서 고생해..."


".... 알았어. 일단 출근 잘하고 이따가 얘기해"


집을 나서서 호텔로 걸어가는 길, 스타벅스를 들고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매달리고 있지 말고, 오늘의 내가 할 일에 집중하며 일상을 잘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해서 미국 본사와 컨퍼런스 콜이 잡혀 있어서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데이비드가 나를 불러 어제 일에 대해서 물어봤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나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건지 사실대로 얘기를 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한동안 말이 없던 데이비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


나는 그와 이혼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지, 즉 결과만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데이비드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가장 힘든 건,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는 거야. 나한테 이렇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인데 다시 못 볼 생각을 하니 왜 이렇게 슬플까? 이런 내가 멍청하게 느껴져."


"헤어질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돼. 네가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으니, 머리는 끝이라고 말해도 마음이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그런 너 자신을 탓하지 마.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지금은 이별로 인한 슬픔이 가장 크니까 우선은 헤어지지 않고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며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데이비드에게 털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로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메일이 왔다.


시부모님께 자신의 잘못을 상세히 고백한 내용이었고, 나를 참조로 넣어서 보낸 메일이었다.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는데,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메신저로 데이비드에게 이 내용을 알려주자,


"그 여자 남편에게도 이 내용을 알리라고 해"라고 답장이 왔다.


"일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라며 내가 묻자


"아직 둘이 같은 회사 다니잖아. 저렇게 하면 둘 중에 한 명이 그만두게 될 거고 불륜은 자기 일자리 뺏기면서까지 유지되지 않아" 라며 스마일 이모티콘을 보냈다.


남편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리 둘만 이렇게 지옥에 있는 게 억울해.
그 여자 남편에게도 불륜 사실을 알려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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