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남편이 근무하는 부서의 주재원으로 오셨던 부장님의 귀임을 앞두고 송별회가 있던 날이었다.
남편은 운전을 길게 해야 해서 회식 자리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날은 9시쯤 전화가 와서 뉴믈든까지 와달라고 했다.
부장님이 대리운전을 불러주겠다고 하셔서 술을 많이 마셨는데, 우리 동네까지 오는 대리기사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회식장소에 도착하니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 통화한 후 더 마셨는지 남편은 많이 취해 있었다.
남편을 포함해 남자 직원 7명, 여자 직원 2명이 있었는데, 테이블로 다가가 인사드리자 부장님이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하셨다.
"아, 우리 팀 막둥이 예쁜 와이프 오랜만이네.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했어? 연애 좀 오래 해보고 서른 넘어서 하지. 저 자식이 결혼 안 해주면 죽겠다고 협박한 거 아니야? 자, 자, 맥주 한 잔 마셔요."
부장님은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곁에 앉아 있기 힘들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마시고 싶은데 운전해야 해서요…"
"맥주 한 잔은 괜찮아~ 음주운전 단속도 안 하는데…"
너무 취하신 상태라 차라리 마시는 척이라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네, 부장님. 그럼 한 잔 주세요."
부장님이 따라주는 맥주를 살짝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내 앞에 계신 과장님이 "죄송해요. 오늘 다 너무 취했어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남편 옆에 앉아 있던 여직원 한 분이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신혼 재미있어요? 결혼한 지 2년 넘었으면 질릴 때 아니에요? 남편이 잘해줘요?"
대답도 듣지 않고 계속 질문이 이어졌다.
"네… 아직까지는 잘해주네요."
약 두 시간정도 더 이어진 술자리가 끝난 후 남편에게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물으며 걸어가는데 그 여직원이 따라오며 말했다.
"제가 회사에서 차를 얻어 타고 왔는데, 목도리를 두고 와서요."
늦은 시간인데 취한 그녀가 걱정되었다.
"혹시 어디 사세요? 너무 늦었으니 태워다드릴게요."
"아니에요. 남편이 오고 있어요."
결혼하신 분이구나. 그녀의 남편이 데릴러 온다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네. 내일 출근하려면 다들 힘들겠어요."
주차된 차의 문을 열고, 남편이 보조석에 앉자 그 여직원이 남편이 깔고 앉은 목도리를 꺼내면서 그의 엉덩이를 손으로 톡 치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인사를 하고 출발하는데 컵홀더에 커피가 반쯤 남은 스타벅스 컵이 꽂혀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뚜껑에는 립스틱 자국이 있었는데, 취한 남편이 그걸 마시려고 해서
"오빠, 그거 아까 그분이 마셨던 거 같아. 립스틱 묻었어."라고 말리자
"괜찮아. 목말라."라며 식어서 차가워진 커피를 그냥 마셨다.
평소 깔끔한 성격인 남편이 술에 많이 취하긴 했구나 싶었다. 그런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 즈음부터 남편은 아이를 갖자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 갖기로 했던 것 아니냐고 했지만, 어차피 몇 달 뒤면 졸업이니 지금 임신해도 졸업하고 출산하게 될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그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고, 내가 먹던 피임약을 숨기기도 했다.
나도 아이를 낳을 거라면 빨리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3월부터는 엽산을 챙겨 먹고 술을 끊었다.
쉽게 임신될 줄 알았지만, 7월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2007년 8월, 한국으로 휴가를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남편이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회사에서 취업비자를 받은 지 얼마 안 됐고, 새 부서로 옮기게 되어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오빠, 내가 혼자가면 어머님, 아버님이랑 오빠 없이 며칠을 지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할 것 같아. 연말에 같이 가자."
"우리 집 가지 마. 너 한국 간다고 얘기 안 할게. 졸업도 했으니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아… 그러다 들키면 너무 무서운데…"
"걱정하지 마. 들킬 일 없어. 2주 동안 우리 둘이 휴가 간다고, 메일로 안부 전하자고 해놓을게."
망설여졌지만, 한편으로는 좋았다.
그렇게 나 홀로 한국으로 휴가를 떠나 엄마와 남동생과 셋이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후 열이 나고 머리도 아파 누워있는데, 엄마가 혹시 임신한 건 아닌지 물었다.
"아니야… 어… 잠깐… 생리 예정일이 5일이나 지났긴 했어…"
엄마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다주셔서 해보니 임신이었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남편에게 알리라고 해서, 다음 날 초음파를 봤더니 역시 임신이 맞았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한 시간쯤 후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와 임신 소식을 전하니
"어. 잘 됐네."라며 남 얘기하듯 반응하더니, 업무를 집으로 가져와 마무리해야 한다며 통화를 서둘러 끊었다. 그는 갑자기 늘어난 업무와 출장으로 많이 바빴다.
임신 사실을 알고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입덧이 시작되었는데 가족들과 친구들이 잘 챙겨줘서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꼭 안아주며
"너무 보고 싶었어. 우리 이제 셋이네."라며 웃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그리웠던 그의 품에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주말이 되어 빨래를 하려고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를 걷어내자 콘돔 껍데기 일부와 실핀이 바닥에 떨어졌다.
콘돔 껍데기는 몇 달 전 사용했던 게 이제야 나온 것이고, 내가 실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워낙 작으니 밖에서 만난 누군가가 쓰던 게 딸려 들어왔나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그것들을 주우며 자기가 청소할 테니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내가 다 할게! 너 무리하면 안 돼.지난 번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조심해야지 진짜로"
입덧 때문에 매일 복숭아와 사과 주스만 마시느라 힘이 없었는데, 청소, 요리, 빨래까지 다 해주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다음날,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데, 일이 많아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며 나 혼자 예배에 참석 할 건지 물었다. 혼자 가기 힘들면 집에서 쉬라고 했다.
내가 예배 드리러 가겠다고 하자, 교회에 데려다주고는 급하게 떠났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는 그가 안타까웠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 소파에 앉았는데 남편 회사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출근한다더니 왜 노트북을 두고 갔지?'
전화를 해서 노트북을 두고 갔는데 괜찮냐고 물으니, 회사에 PC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고요했다. 사무실의 적막함이라고 하기엔 다른 분위기의 고요함...
전화를 끊고 남편의 노트북을 켰다. 예전에 비밀번호가 회사명+입사년도였다는 게 떠올랐다.
처음으로 그의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아웃룩에 들어온 회사 메일은 꼼꼼한 그의 성격답게 부서별, 사람별, 업무 중요도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보낸 내역을 보는데,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봤던 여직원에게 제목도 'Gmail', 내용도 'Gmail'이라고만 써있는 메일을 보게 되었다.
Gmail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 여직원과 짜릿한 비밀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 있어 집을 비웠던 기간 동안, 그 여직원이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들의 애정행각이 적나라게 찍힌 사진들과 지저분한 메일 내용… 둘은 뜨거웠고 더러웠다.
내가 남편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저속한 표현을 하지 않아서였는데, 그 여직원과 대화할 땐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장이 내려앉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정리를 해보려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임신까지 했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들이 주고받은 메일과 사진을 전부 내 메일로 포워드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메일을 작성했다.
제목: 000씨(남편)와 ㅁㅁㅁ씨(여직원) 두 분 행복하세요
내용: 제가 떠나겠습니다.
그 둘이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 캡처본과 이미지들을 첨부하여 메일을 발송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문자로 'Gmail'이라고만 써서 보냈다.
십여분 쯤 지나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바로 집에 가서 다 설명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를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캐리어를 꺼내어 짐을 챙겨, 집 근처 Holiday Inn으로 갔다.
40여 분 뒤 집에 돌아온 남편은 내가 없는 걸 알고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았다.
"제발… 얼굴 보고 얘기하자.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제발 집에 와. 내가 빌게."
"오빠… 앞으로 필요한 말은 메일이나 문자로만 해.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면 핸드폰 꺼버릴 거야."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제발… 나 진짜 죽어... 제발..."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고 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너는 오늘 두 사람을 죽였어."
환한 미소로 웃으며 다가와 준 사람, 나에게 첫 요리를 해주고 와인을 알려 준 사람,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해주던 사람, 존재만으로 나를 설레게 해준 아름다운 그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