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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를 버렸다.

by 티타임 스토리


2013년 6월.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


그리고 남편은 시댁에, 난 친정에만 연락하며 각자의 가족들을 챙겼다.


1년 전 영주권을 땄고, 남편은 영주권 취득하고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할 때 나에게 주던 공동생활비만큼의 돈은 매달 주었기 때문에, 사업하는 데 자금이 얼마나 들었는지, 매출이 얼마나 나오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사업을 하게 되면서 출퇴근 시간에서 자유로워졌기에 아이 학교 등교와 하교를 맡아서 했고, 나도 매달 한두 번은 해외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기에 직장생활에 집중하기도 편해졌다.


내가 다닌 회사는 두 달에 한 번씩 '팀 빌딩 데이'를 가져서 팀마다 자유롭게 회사 밖에서 게임, 뮤지컬 관람, 런던 외곽 여행, 서바이벌 게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날은 지정된 연기자들을 곳곳에 숨어 있게 한 후 조별로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힌트를 한 개씩 주며, 마지막 문제까지 다 풀면 최종 목적지인 레스토랑에 가서 모두 만나는 셜록홈즈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에 참여하기 전 회사에서 나눠준 단체 코스튬을 입었어야 했는데, 고스트 버스터즈 의상에 가면까지 써야 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난 프랑스 출신 엠마와 한 조가 되어, 약 두 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고 드디어 마지막 문제까지 해결하여 레스토랑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멀리 남편이 보였다.


가면을 쓰고, 코스튬을 하고 있으니 남편은 당연히 나를 못 알아봤는데, 남편과 옆에 있던 여자가 갑자기 멈춰서 서로의 볼을 마주대고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는 템즈강을 배경으로 다시 셀카를 찍고, 키스를 했다.


난 조용히 핸드폰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었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Once a cheater always a cheater (한번 바람둥이는 영원한 바람둥이)"라는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처럼 남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 저런 광경을 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고 아프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들 옆을 지나갔고 레스토랑에서 회사 동료들과 즐겁게 먹고 마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 그의 페이스북을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다.


아까 그 여자가 누군지 바로 확인되었다.


"선배님, 런던 비행 가니까 곧 만나요"


남편 대학 후배였고, 승무원이었으며,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유부녀였다.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그건 분노도 아니고, 실망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었다.


가라앉았지만 우울하지는 않고, 뭔가 텅 빈 기분이었다. 해탈을 한 걸까... 그의 외도가 언젠가는 또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집에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척 샤워를 하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아이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출근길에 남편에게 전날 찍은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는 어차피 나는 안중에도 없겠지만, 우리 애를 함께 키우고 있는 도시에서 애한테 부끄러운 짓 하지 마."


"누가 찍어서 보내준 거야?"


"그게 중요해? 보는 눈은 항상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누구냐고, 말해"


"한 번만 더 누구냐고 물어보면 그 여자와 그 여자 남편에게도 같은 사진 보낼 거야."


"... 미안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오니 남편이 급하게 외출을 했다.


밤 11시, 그가 들어오는데 유난히 쿵쾅거려 나가보니 엄청나게 취해 있었다.


"너...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예전에 너... 나한테 엄청 잘해줬잖아."


"빨리 씻고 자. 취한 사람이랑 말하기 싫으니까"


주방에서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빨리 잠에 들고 싶었다.


취한 그가 샤워를 마치고 옆에 누웠다.


나도 방금 전 위스키를 마셨지만 남편의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술 냄새가 참기가 힘들었다.


남편은 금방 잠에 빠졌고, 난 아이 방으로 가서 잤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너가 너무 차가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얼굴 보고 하려고 했는데 못 했어. 예전에 날 따뜻하게 봐주고, 세심하게 챙겨주고, 다정하게 하루를 묻던 시절이 많이 그립다. 어느 순간부터 외로웠어. 너랑 다시 잘 지내보고 싶었는데 너는 마음을 닫아 버린 것 같아서 다가가기 힘들었어. 오늘 퇴근해서 나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지금 내가 오빠를 외롭게 만들어서 바람피운 거라고 하는 거야? 오빠가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걸 봐도 아무렇지 않은 지금의 내 감정 상태가 되기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모를 거야.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오빠한테 있어"


늘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돌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려고 하는, 그의 교묘한 화법이 생각할수록 짜증 났다.


퇴근길 집 근처 펍에서 잭앤콕 한 잔을 마시고 들어갔다.


문을 여니 남편이 나를 안으며 "내가 이제부터 진짜 잘할게.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머리부터 목, 팔, 손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며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이 나왔다.


아...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을 진절머리 나게 싫어하는 거였구나.


연인사이에 제일 잔인한 게 뭔지 알아?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야.
그 짓을 오빠가 나한테 했어




다시는 나를 함부로 안거나, 만지지 말 것이며 지금껏 그래왔듯이 경제적 공동체, 공동 육아자로만 살자고 경고했다.


2015년 여름 취리히에 2박 3일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몇 년 만에 시어머니에게 이메일이 와있었다.


"사랑하는 며느리, 그동안 아들하고만 연락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용기 내어 너에게 사과를 하려고 메일을 보낸다. 너를 아프게 했던 말들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매일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으니 너의 마음도 풀렸으면 좋겠다. 산이하고도 예전만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 사랑하고 축복한다."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잘 보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잘못한 것도 아닌데 눈치 보면서 애쓰던 어린 20대의 내가 생각나서 잠시 슬퍼졌다.


그럼에도 어머님이 연세 드시면서 바뀌신 것 같고, 나에게 이런 사과 메일을 보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서 답장을 드렸다. 부족한 며느리라 항상 죄송하고, 앞으로 잘 지내고 싶다고...


내 마음속에 이렇게 연락도 안 드리며 살다가 시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내가 감당을 못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번 계기로 잘 풀리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출장에서 돌아왔다.


남편이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난 시어머니와 다시 연락하게 되어, 본인도 앞으로 우리 집에 사위 노릇을 하겠다는 내용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업을 하게 되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당장 갚아야 할 돈이 약 2억 8천만 원이라고 했다. 한 번만 살려달라며 구걸하다시피 애원했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편이 분명 시댁에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거고, 도와주긴 싫으니 나에게 사과 이메일을 보내서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던 거였다.


며칠에 걸쳐 그의 개인 계좌와 법인 계좌의 거래 내역과 대출 내역 등을 살펴봤다.


그의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자금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몇 배의 돈이 나가고 있었다.


비싼 레스토랑, 최고급 호텔, 짧은 노선도 비즈니스 좌석, 최고급 와인과 위스키.... 은행 돈으로 대표놀이 하면서 비싼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난 은행 대출과 회사에서 나오는 직원 대출을 받아 갚아줄 테니 사업을 접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되어 있는 집도 내 명의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집을 살 때 시댁에서 2억, 친정에서 1억을 보내주셔서 구입했는데 내가 2억 8천을 갚아주니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당장 방법이 없으니 그도 내 조건을 수용하여 사업을 접고, 집 명의도 바꿨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약 한 달 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대학 동기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동업 제의가 들어왔다며, 영국으로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친구들도 그립고 영국 생활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그는 더 이상 아이도 그의 삶에 1순위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 가라... 별말 없이 보내줬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한국 여학생을 베이비시터로 구했다.


평일 3시에 아이 픽업해서 내가 집에 돌아오는 6시까지만 돌보는 일이었고, 개인 룸, 욕실, 주급까지 제공하는 일이라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1년 동안 7명이나 베이비시터가 바뀌게 되면서 (영국에서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동거하겠다며 갑자기 나간다든가, 낮잠 자느라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지 않는다거나, 13살 미만은 집안에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아이에게 비밀이라고 해놓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등... 다들 짧게 체류할 곳을 목적으로 책임감이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갔다가 다시 받아주면 안 되냐고 불시에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나도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다 친정 아빠가 큰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걱정할까 봐 나에게 한참 뒤에 알려준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홀로 영국에서 가족들도 못 보고 아등바등 아이를 키우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아이를 위해서도 더 크기 전에 한국에 돌아가서 친가와 외가 친척들과 교류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한국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집을 팔아, 지난번 대출받은 것들 다 정리하고 남은 돈을 보내줄 테니 한국에 집을 구해놓으라고 했다.


약 6개월에 걸쳐 영국의 생활을 다 정리해 놓고 드디어 2017년 아이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살게 될 집으로 우선 갔다.


영국에서 가지고 온 캐리어 정리를 하고, 쉬고 있는데 시부모님이 방문하셨다.


어머님이 갑자기 이 집에서 같이 살면서 아이를 봐주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평생 교사로 있으면서 손주, 손녀들도 봐준 적이 없거든. 그게 한이 되어서 남은 평생은 손녀 봐주면서 아들 며느리랑 살고 싶어"


남편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대답해야 한다.


"어머님 영국에서 저 혼자 아이 키우면서 살았어요. 마음은 이해가지만 이제 아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라 괜찮을 것 같아요."


"씨발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시어머니가 와서 이렇게 부탁하는 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이렇게 바로 거절해? 에라이... 사탄 들린 년..."


태어나서 그런 쌍욕은 처음 들었다. 차가운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니 남편이 시아버지와 함께 어머님을 모시고 나갔다.


몇 시간 뒤 시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돌아온 남편에게 혹시 어머님 치매 아니신지 물었다. (치매가 아니고서야 아무리 막말을 해도 저런 욕을 하실 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기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하냐고 했으나 한 달 뒤 초기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했을 거라 짐작했었고, 치매 판정도 실제 받으셨기 때문에 어머님의 욕설은 내 마음에 남지 않았다.)


영국에서 들어오기 전 한국에서 다닐 직장도 미리 구해놔서 일주일 쉬고 바로 출근을 했다.


남편의 사업이 잘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늘 바빴다.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고, 주말에도 수시로 나갔다.


어느 날은 출근하는 나와 들어오는 남편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수요일, 토요일 오전에 청소를 해주시는 여사님이 갑자기 못 오시게 되어 내가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남편 책상 서랍안의 콘돔과 모텔 영수증, 산부인과 영수증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명함에 하트가 그려져 있고 손 편지가 함께 있어 곧이어 상간녀의 정보도 알게 되었는데 미국계 글로벌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의 차에서 블랙박스 SD카드를 꺼내어 PC에 저장하고 모든 증거를 하나씩 수집했다.


그리고 이혼 전문 변호사를 소개받아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 월세였다.


영국에서 집을 팔아 대출을 정리하고 10억이 넘는 돈을 보냈는데 보증금 5천짜리 월세를 얻어놓고 전세인 척했던 것이었다. 재산 분할을 해야 하는데 빚밖에 없었다.


시부모님은 매일같이 울면서 전화하셨다


"산이는 너 없으면 안 돼. 걔 진짜 인생 힘들어져. 너가 붙들어줘야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혼하면 안 돼."


... 죄송하지만 어머님, 아버님이 다시 믿음의 아들로 키우세요.


그 사람의 바닥을 이미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이혼 소송 중 보게 된 그 바닥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었고, 치사함과 집요함은 사람에 대한 혐오까지 생기게 했다.


상간녀 소송을 안 하는 조건으로 위자료 5,000만 원과 집 보증금 5,000만 원을 받는것으로 합의를 했다.


2020년, 이혼 소송 2년 7개월 만에 드디어 이혼이 성립되었다.


지긋지긋했던 법적인 관계가 오랜 지저분한 싸움을 통과하여 드디어 남이 된 것이었다.


난 그렇게 그를 버렸다.





에필로그



전남편과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원래 3회 정도 더 쓰려했는데, 마음이 많이 괴로워 이번화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소송 중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 위자료 조정 중 보게 된 졸렬함, 친정 부모님께 행했던 악질 행동 등 모두 써보려고 했지만 차분히 작성하기가 어려웠어요)


저는 사실 힘들었던 것을 이야기해봤자 해결 되는 것은 없는데 그 아픔과 고통만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털어 놓았던 적이 없어요.


영국에서 공황장애로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심리 상담을 받을 때도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어요. 아무도 저를 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상담사가 저의 우유부단한 태도와 마음 약한 모습을 한심해할 거라 여겼거든요.


그런 제 마음을 알았던 건지 상담사가 해준 이야기가 있었어요.


"의존할 사람이 없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독립심이 강해져요. 공황장애가 있지만 우울증이 없는 이유도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 우울에 잠식당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어선데, 과거의 일부터 일기 쓰듯 써보세요. 어떤 상황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방법이 떠오를 거예요."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위의 말이 갑자기 떠올라 조금은 두려웠지만 더욱 단단해 지기 위해 시작한 글입니다.


오래된 일을 쓰다 보니 기록으로 남겨진 이메일과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행복했던 순간도, 아픈 기억도 담겨 있어서 쓰면서 펑펑 울기도 했고, 사랑했던 기억으로 마음이 말랑해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이혼 후 5년이 넘는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남기려고 합니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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