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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더라

by 티타임 스토리

뜨거웠던 사랑이 식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틈만 나면 온통 상대방 생각으로 가득하고, 심장이 저릿저릿 설레는 시간도 결국엔 익숙함 속에 일상에 녹아든다.


설렘에서 익숙함으로 가는 속도는 각자 다르다.
이 속도가 더 느린 사람은, 변해버린 것 같은 상대를 보면 서럽고 서운하다.




2011년의 나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웠다.


나에게 무관심한 그에게 화가 났고,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 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와 누구보다 사랑해 줄 것처럼 굴고, 결혼부터 임신까지 초스피드로 밀어붙였던 그가, 외도를 했고, 그 외도를 눈감아줬음에도 이제 내가 본인을 더 좋아한다는 이유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나를 눈치 보게 만드는 게 분했다.


그럼에도 잘 극복하고 싶었다.


남편의 작은 행동에도 “고마워, 사랑해, 최고야”라고 마음을 표현했고, 취미가 많은 그를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렇게 하면 나의 런던 생활에 가이드였고, 친구였고, 보호자였고, 다정한 애인이었던 남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아이에겐 좋은 아빠였다.


모든 일에 아이가 1순위였고, 쉬는 날이면 아이와 다양한 곳을 방문하며 여러 경험을 하게 했다.


아이가 만 30개월 될 때까지 함께 여행한 나라만 해도 무려 13개국이었다.


친정아빠는 무뚝뚝하고 보수적이라 나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우리 아이에게는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주는 다정한 아빠가 있다는 게 좋았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부터는 아이방에서 혼자 분리수면을 했는데, 우린 침대에서도 각자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하며 대화 없이 잠에 들었다.


그리웠다. 저녁을 먹으며 웃으며 대화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떠들고, 잠들기 전까지 그의 품 안에서 미처 못 했던 얘기들을 소곤소곤 수다로 떨어내던 밤들이 너무 그리웠다.


밖에서는 부러움을 사는 부부였다. 둘 다 좋은 회사 다니고, 교회 생활도 잘하고, 아이도 열심히 잘 키우는...


내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들 보기에 괜찮은 부부, 또 아이에게는 좋은 아빠가 있는 것만으로도 애써 괜찮은 인생이라 위로하며 살았다.


영국 문화 특성상 가족 모임, 부부동반 모임이 많아서 우리도 일주일에 한 번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거나 초대하며 교류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 모임에서 별거 아닌 일로 사람들 앞에서 크게 싸우거나 상대방을 험담하는 부부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저렇게 싸우지 않으니 저들보다는 좋은 관계라 생각했다.


그땐 몰랐다.
차라리 싸우며 감정을 드러내는 게 더 건강한 관계라는 것을...
서로에게 최소한의 기대나 애정이 있어야 싸움도 있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어느 순간 바짝 메말라, 작은 힘에도 바스러질 듯 부서질 수밖에 없는 관계가 이때부터 되어 있었다는 걸 이혼하며 알았다.


어느 날 친정엄마 생신이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엄마를 바꿔주려 하자 그 자리에서 “아, 안 받아~”라며 짜증을 내고 나가버렸다.


수화기 너머로 남편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을 텐데, 너무 민망하고 당혹스러워 통화를 서둘러 끝냈다.

남편은 결혼해서 단 한 번도 장인. 장모 생일이나 명절 때 전화한 적이 없었다. 왜 먼저 연락을 드리지 않는지 몇 번 물었었는데 그때마다 '불편하다'는게 그의 대답이었고, 그럼에도 직접 만나면 예의 바르고 듬직하게 행동했었기에 별말 없이 넘어갔었다.


나의 배려와 이해가 결국 나만 호구로 만든 것뿐 아니라 내 부모님까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신호가 된 것 같아 괴로웠고, 나 혼자만 애쓰고 노력하는 게 아무 의미 없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시로 챙기던 시댁 안부 전화, 명절과 생신 때 보내던 꽃과 케이크, 영국에서 직접 사서 보냈던 명품가방, 옷, 신발 선물들을 그날 이후로 그만하기로 다짐했다.


그 뒤로 시가에서 안부전화가 와도 일부러 받지 않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남편에게 직접 연락하시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몇 주 뒤, 시어머님의 생신이 다가왔다. (솔직히 이 날을 기다렸다)


지난번 다짐한 대로 연락도 안 드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난리가 날 것 같았는데 생신 당일은 한국에서 연락도 없었고, 본인이 친정엄마 생신 때 어떻게 했는지 가장 잘 아는 남편 또한 아무 말 없었다.


그 다음날 자려고 누웠는데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면서 신세한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통화하다가 나를 바꿔달라고 했는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나도 똑같이 안 받는다고 하고 짜증 내고 나가버릴까 잠시 망설였지만, 난 그 정도의 강심장은 아니었다.


"야 너는 결혼한 지 몇 년 되었다고 시어머니 생일도 잊어버려... 응? 교회 사람들이 영국에서 아들부부가 뭐 해줬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아주 지어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어머님 생신 어제였던 거 알아요...."


"뭐?... 참나... 너네 둘이 싸웠으면 둘이 풀어야지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그걸 시부모한테 풀어... 너네 엄마한테 그렇게 배웠니? 어?" (내가 남편과 싸우고 홧김에 전화를 안 한 줄 아신 듯 했다.)


"저희 엄마한테 배운 게 아니고 어머님한테 잘 배운 00 아빠 따라 하는 거예요. 00 아빠 결혼하고 단 한 번도 처가에 생신. 명절 때도 연락을 드린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너네 엄마 아니고 사돈이라고 해주세요."


"... 어머나... 세상에... 너 너무 무섭다. 그동안 착한 척, 순한 척하면서 이렇게 따지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어... 아이고 주여..."


"똑같은 이유로 저도 어머님 무서워요. 그리고 00 아빠도 너무 무서워요."


남편에게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내가 너무 무례했던 건 아닌가, 아무리 서운해도 시어머니께 그렇게 말하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편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경솔했다는 불안이 들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판단이 서질 않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갑자기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져 크게 숨을 쉬려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심장 통증이 심해졌다.


가느다란 숨을 내뱉으며 집으로 겨우 들어갔더니 남편이 화를 내려다가 식은땀에 젖어 창백해진 나를 보고는 응급실에 데려갔다.


남편과 아이는 대기실에, 나는 응급실로 들어가 피검사, 심전도, 심장초음파, 흉부 엑스레이 등 검사를 마치고 베드에 누워있었다. (접수 후 응급실로 들어간 순간부터 증상이 사라졌으나 온 김에 필요한 검사를 다 받았다. )


당직 의사가 들어오더니 내가 누워있는 베드 옆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지금 기분은 어떤지, 무슨 회사 다니는지, 무슨 업무를 하는지, 어디 사는지 등을 물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 같으니 심리상담을 받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단순히 죽을 것 같은 공포심만 느낀게 게 아니고, 분명 심장에 엄청한 통증을 느꼈고 그래서 심리적 요인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하자 평소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몸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몰라 다양한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내가 계속 불안해하자, 니트로글리세린을 처방해 줄 테니 심장이 또 아플 경우 혀밑에 알약을 넣어 녹여서 먹고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또한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심리상담사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간호사가 수액을 빼주었다.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당직의가 대기실까지 데려다준다며 휠체어에 앉으라고 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남편이 잠들어있는 아이를 안고 다가왔다.


당직의는 남편에게도 혈액검사, 심전도 등 검사 결과와 심리상담 권유 내용을 알려주고 떠났다.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던 남편이 갑자기 물었다.


"근데 심장초음파 누가 했어?"


"아까 그 의사"


"남자잖아"


"그래서?"


"넌 생각이 없냐? 남자한테 심장초음파를 왜 받아! 의사를 바꿔야지. 넌 백인 놈이라면 눈이 돌지?"


... 또 시작이다... 그의 기이한 포인트에 꽂힌 발작...


"오빠는 지금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내가 응급실을 왜 갔는데"


"됐고. 응급실에 의사가 걔 한 명이었냐고!!!"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알려주는 대로 검사받고 베드에 누워있었는데.."


"그 새끼가 너 가슴 봤을 거 아니야!"


"... 오빠 진짜 정신병자야? 나한테 애정도 없으면서... 그딴 쓰레기 같은 그 질투심은 왜 못버리는거야?"


그가 거칠게 운전하기 시작했다. 뒤에 아이가 타고 있다고 몇 번을 얘기했으나 듣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난 침대에 바로 누웠고, 남편은 아이를 재우러 아이방으로 갔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었는데 방으로 돌아온 남편의 병적인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새끼 손이 가슴에 닿았어?"


"... 그게 왜 중요해. 검사잖아!"


"대답이나 하라고!"


"... 하.... 닿았다. 닿았어! 됐어? 자야되니까 사람 좀 그만 괴롭혀. 나 진짜 너무 힘들어"


그는 이제 입을 닫고 신체적으로 괴롭혔다.


경험으로 반항은 상처만 더 남긴다는 걸 알고 있어서 조용히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이 날 이후 남편에 대한 감정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갔다.


기대가 없으니 서운하지도 않았다.


섭섭함, 사랑받고 싶은 마음, 잘 보이려고 했던 노력이 다 내려지니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우린 그저 경제적 공동체이자 공동 육아자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두개의 감정 굴곡선이
같은 지점으로 일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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