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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수 Nov 25. 2024

엄마야 누나야 그리고 부용산

   

  우리는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를 미상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몇 해 전에서야 작곡가가 ‘안성현(安聖絃 1920~2006)’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안성현은 나주 남평 출신이다. 아버지 ‘안기옥(安基玉 1894~1974)’은 가야금산조 명인이다. 안기옥은 일제강점기에 항일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평양 조선고전악연 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안성현은 도쿄의 도호 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한 후 전남여중과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그리고 1947년에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으로 자리를 옮긴다.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안막은 월북 무용수 최승희의 남편이다

최승희는 우리나라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이끈 무용계의 전설적 인물이다최승희에게는 안성희라는 딸이 있다무용수인 안성희가 공연차 목포에 왔다가 1950년 9월 북으로 돌아가자 안성현은 부친 안기옥과 최승희를 만나기 위해 안성희의 북행길을 동행했다가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안성현은 북에서 조선음악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족음악 유산 정리와 민요 발굴 등에 힘쓰다가 2006년 4월에 사망했다.     

  안성현 작곡가를 이야기할 때는 ‘박기동’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박기동(朴璣東 1917~2004)’ 시인은 여수시 돌산에서 태어나 한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벌교로 이사를 왔다그리고 그는 14살에 일본 유학을 떠나 관서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귀국하여 벌교 남초등학교와 벌교 상고에서 국어, 영어 교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947년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 좌익 계열의 '남조선교육자협의회'에 가입한다. 이때 일명 ‘교협사건’이 발생하여 교사직을 박탈당한다. 박기동 시인에게 ‘붉은 낙인’이 붙게 된다.


  시인은 벌교 상고에 재직 중에 여동생(박영옥)이 폐결핵으로 죽자 벌교에 있는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쓴 시가 부용산이다그리고 시인은 목포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안성현과 만나게 된다목포항도여중에서는 경성사범학교를 입학했었던 천재 문학소녀 김정희’(19311948.10.10.)가 전학하여 옴에 따라 김정희를 가르치기 위해 ‘조희관’ 교장이 안성현과 박기동을 초빙하게 된다그러나 1948년 10월 10일 전학 8개월 만에 김정희가 요절하자 안성현은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이라는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며 상여가 운구되었다고 한다이것이 엄혹한 해방공간에서 또 하나의 족쇄가 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이 발생한 후 지리산으로 입산한 입산자들이 부용산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자 빨치산의 노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은 그렇지 않아도 교협사건에 붉은 족쇄에 묶여있는데 부용산이라는 시가 빨치산의 노래가 되어 버렸으니 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1993년 76세의 나이에 혈혈단신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시인은 2000년도에 잠시 귀국해서 부용산에 묻힌 동생의 묘지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사랑하는 내 동생은 한 떨기 들꽃이 되어 피어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아쉬워했다고 전한다시인은 2003년에 영구 귀국하여 2004년 8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이것이 해방공간에서 두 천재 예술가가 살았던 처절하고도 기구한 삶이다.     

 오늘은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린다어둠이 깊어질수록 방안은 고요만이 침묵하고 있다눈을 감고 안성현 선생이 작곡한 곡과 김광수 선생이 작곡한 곡을 듣는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안성현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O0OpFXojU9M&list=RDO0OpFXojU9M&start_radio=1    
   김광수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8iZc4sDAxFM     

 

 그리고 안성현이 작곡한 부용산을 듣는다. 원래 이 노래는 1절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시인은 52년이 된 2000년에 부용산 2절을 쓰게 된다. 그중에서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라는 문장을 써 놓고 팔순 시인은 펑펑 울었다.”라고 한다. 2절은 2000년 5월에 열린 ‘목포 부용산 음악제’에서 발표됐다.

        (1절)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https://www.youtube.com/watch?v=04QpxtnNcOw  


        (2절)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한 편의 시가 노래가 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아픔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해방공간을 숨 가쁘게 넘어왔다. 험난한 역사를 넘어와 오늘날 이 땅에 평화와 자유가 넘실거림에 감사하다. 비 오는 가을밤에 귓가에 맴도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라는 구절에서 생각은 지혜를 쫓아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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