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을 떨며 찾아들었던 산방山房 입니다. 찻물 냄새가 향기로웠던 첫날부터 먼 산을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산방을 나서며 앞산을 바라봅니다.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순간 사라짐을 느낄 때 자연은 위대함으로 다가옵니다.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법당에 무엇을 들고 오셨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붙들고 온 것들이 다 욕심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냥 빈 마음으로 들어와 법문 한 줄 담아가면 그뿐인 것을 근심 한가득 짊어지고 들어와 법당을 채웠다고 합니다.
비워야 담을 수 있습니다. 두 손에 욕심 가득 쥐고 앉아 부처님이 주신 것은 어떤 손으로 쥐고 가겠습니까? 스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렇게도 붙들고 싶다면 “하나만 법당에 올려놓아 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다 들어줄 것이니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묵묵히 기다리라고 합니다.
헝클어진 것들이 잘 풀리지 않거든 여유로움을 찾아 마음을 비워야 한다. 집착으로부터 한발 멀어져야 한다. 진실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내 것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들으며 공허한 상태에서 일체의 사물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헝클어진 것들이 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인생은 자기가 선택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조금 부족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했을지라도 오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이 자유롭고 행복해집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이라고 했습니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갇히거나 묶이지 않고, 마음을 내어 실천하며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에 갇히지 말고,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하지만 어렵습니다.
자주 걷는 길일지라도 생각에 따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바라보는 생각 따라 달리 보입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보면 흐르는 계곡물도 검게 보입니다. 생각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짊어진 욕망을 붙들고 이 사찰 저 사찰을 기웃거리며 너스레를 떨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묻고 싶은 것들을 찾아, 어리석음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무지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했던 숙제 하나를 풀었습니다.
물음을 마치고 돌아와 외진 숲길을 걷습니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햇살을 향해 몸을 뒤틀던 나뭇가지가 살 오른 모습으로 가지를 뻗었습니다. 이제 나무와 한 몸이 되었습니다. 나무가 균형을 찾았습니다. 산길에서는 침묵을 강요하며 “하나의 꽃 이파리 속에서 천 개의 꽃잎을 보고, 먼지 한낱 속에 온 세계와 우주가 들어있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 속에 지혜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 찰나를 알지 못하고 비칠거립니다.
지친 사람에게 말로 설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일상을 회복하고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이 경전”이라고 말합니다. 숲 바람을 맞으며 산새 소리를 듣고, 솔밭에 푸른 난초 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향기 넘치는 사람입니다. 자연의 소리가 풍경이고 법문입니다. 지친 마음을 토닥여주는 소리입니다. 길가에 무성한 잡풀 흔들리는 소리가 나를 위로합니다. 이 소리가 그 어떤 음악 보다 우리를 성찰케 하고 아픔을 치유하게 합니다. 시인은 “소리 들은 무슨 냄새처럼 나를 숲으로 불러들인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눈길 한번 받지 못한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붙들고 있던 욕망의 족쇄 하나를 해방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감히 묻고 답을 구했습니다. 어렵다는 것들을 쉽게 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삶을 길”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후련하고 부끄럽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일체의 불필요한 것을 벗어내라.”라는 스님의 깊고 풍요로운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