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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군(烽燧軍)을 아시나요

조선시대 대표 3D업종, 그리고 그 억울함

  봉수대란 용어를 여러분은 아실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와 기능을 제대로 알거나 봉수대에서 일하던 봉수군에 대하여 아는 사람을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수에서 봉(烽)은 횃불을 이르는 말이고, 수(燧)는 연기를 뜻한다. 그러하니 봉수라 함은 밤에는 횃불로써, 낮에는 연기를 피워 안보상 긴급한 사안을 오늘날의 LTE급 광통신과 같은 빠르기로 전달했던 통신체계를 말한다고 하겠다. 


  봉수대에는 5개의 굴뚝이 있다. 굴뚝에 피어오르는 불이나 연기는 개수에 따라 각각의 의미를 달리한다. 1개의 굴뚝에 봉수가 오르면 아무 일 없이 평화롭다란 뜻이 되고, 2개면 저 멀리 무언가 나타났고, 3개이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며, 4개이면 상륙했고(적이 쳐들어왔고), 5개이면 교전 상태라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 가장 남단의 동래(오늘날 부산) 봉수대에서 봉수를 올리면 서울 남산 봉수대까지 한나절이면 도달하였다 하니, 당시로는 정말 신속한 전달 체계이지 않은가. 다만 함정이 하나 있었으니, 저 멀리 산봉우리의 봉화 줄기를 세어야 하는데, 가물가물하다면 2개를 1개나 혹 3개로, 혹은 그 비슷한 오보가 잦지 않았을까 싶다.


  이 봉수대를 맡아보는 군인을 봉수군이라 하였는데, 훗날 음가가 바뀌어 봉수꾼이라 불렀던 거 같다. 대체로 우리말에 '~꾼'은 조금은 낮추어 부르는 명칭이지 않을까? 장사꾼, 밀렵꾼, 사냥꾼 등등과 같이.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군역은 16세 이상의 남자들의 의무였다. 물론 관직을 가진 자나,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일정 정도 면역(역을 면제해주는 것, 즉 군면제)의 혜택을 주었다. 이는 나랏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자를 우대해서 주었던 한정적인 특혜였는데, 훗날에는 양반 가문 전체에게 주어진 영구적인 특혜가 되어버린다. 일설에 퇴계 이황이 성균관을 들락날락했다는 말이 전하는데, 그 숨겨진 실제 이유가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 군역이 면제되기 때문이라는 것 아니겠던가. 


  어쨌든 봉수대가 있는 지역의 의무 군역 체제가 바로 봉수군이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의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봉수대를 지켰으리라.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이 높은 산봉우리를 오르내려야 하니 몸도 고달팠겠지만, 열심히 해도 본전도 못 찾기 일쑤에다 심지어는 오보의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히 발생하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연줄을 대거나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차례에서 봉수군을 면제받기 위해 노력했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봉수대를 지키는 일은 그 지역에서 가장 힘없고 빽 없는 사람 차지가 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봉수군은 신분이 천민은 아니나 그 하는 일이 천하게 여겨졌던, 거의 천민과도 같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억울함이 하늘을 찔렀을 터.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예를 들자면 조례()·나장()·일수()·조창군()·수군()·봉군()·역보() 등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칭하여 칠반천역(조선 시대 일곱 가지 천대받는 역할을 담당하던 계층)이라 한다. 조례는 중앙의 각 관서에 배속되어 관서 및 고급 관원의 호위와 사령(使)을 맡았다. 사극을 보다 보면 "저리 물렀거라 00 대감 납신다"라고 고함지르는 포졸 비슷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조례일 것이다. 나장은 관아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 주로 "하나요, 둘이요.. "하며 곤장을 때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으며 나졸이라고도 불렀다.


  일수 역시 지방관아에서 행정 말단이나 형사적 업무를 맡던 사람들인데, 지방관청 건물을 짓고 수리하는데 일손을 보태거나, 수령을 맞고 관청의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고, 관청에 딸린 논밭을 경작하기도 하며, 이방으로 대표되는 향리들의 보조 역할을 하는 등, 매우 잡다하고 고된 일을 맡아보았다. 조군은 물길(강이나 바다)을 이용해 조세를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니, 노젓는 일, 배 수리하는 일, 세금 운반의 막중한 책임 등등에서 무척이나 고된 일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고됨을 독자들께서 짐작해 보시길 바란다. 


  수군은 오늘날 해군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국방의 의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함(배)을 건조하거나 수리하여야 했을 뿐 아니라, 무기제작 등에도 일손을 보태야 하는 등, 육군에 비해 훨씬 고된 군역이었다. 역보는 역리(驛吏)·역졸(驛卒)이라고도 하였는데, 각 역에 배속되어 역마(驛馬)의 사육과 그 밖의 잡스런 일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역이라 하면 지하철이나 기차를 갈아타는 곳으로 알겠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말을 갈아타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곳곳에 고개가 있는 지형은 말에게는 매우 피곤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과는 달리 30리 정도마다 말을 갈아탈 수 있는 곳을 설치하였는데 그곳이 역이다. 암행어사가 높이 쳐들어 흔들어댔던 마패는 이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나타내는 증표였었다. 여기서 잠간! 마패는 암행어사만 쓰던 것이 아니었다. 공적 업무로 원거리 출장을 가는 경우에는 역마를 이용했고, 역마 이용을 위해서는 마패를 제시해야 했음은 상식! 


  위에서 언급한 이들 모두가 힘든 역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중에서도 조군·수군·봉군·역보 등은 가장 힘든 고역(苦役)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일반 양인(조선 시대에는 평민을 양인이라 칭하였다)들은 자신들에게 그 역할이 배정될까 심히 꺼렸다. 그러니 국가에서는 이런 역할을 맡아 할 사람들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이들의 역을 아예 세습시키는 경향이 생겼고, 결국 이들은 거의 천민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니,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만들어낸 가장 억울한 인생들이 바로 칠반천역, 그들이었다. 


  묵묵히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거나,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쳐주지 않는 일이 어찌 조선 시대까지로 한정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 역시 그런 현상이 지속되고 있지 않을까.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허울좋은 칭송을 받으면서 그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이 있다. 하지만 한때는 군인을 '군바리'라는 비속어로 불렀을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모순은 남성들이 군복무를 하는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우리 사회는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군면제를 받는 사람들을 '신의 아들'이라 부러워 하는 사회적 현상이 있다. 


  그뿐이랴. 출산율이 세계 최하라 온 사회가 우려를 하고, 다산을 한 여성에게는 '애국자'라 치켜세우지만 정작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물론 남성도 있을 수 있겠다)에게 경력단절이라는 불명예와 손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푸는 대한민국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런 개같은 경우는 구석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인턴이라는 허울좋은 스펙으로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 동일노동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의 2/3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의 문제는 어떠한가. 이렇게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칠반천역'들이 넘치고 있다. 


  출산과 육아를 담당한 여성으로, 프리랜서란 이름의 항상적 비정규직인 나는 그래서 현대판 칠반천역이고 그래서 많이 억울한 인생이었다면 지나친 투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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