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 주면 이 클래스가 끝나고 다음 단계의 베트남어 교재로 바뀌게 되는데, 타오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시간에는 테스트를 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 벌써 10개월이나 공부했는데 베트남어가 아직 어렵죠?"라며 그래도 우리 반은 잘하고 있는 편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선생님은 이에 덧붙여 원래 베트남어는 3년쯤 배워야지 잘할 수 있는 거라고 하는데, 난 "3년 지나면 저는 한국에 들어갈 거예요. 베트남어를 잘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한국으로 가겠네요."라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열심히 배운 뒤에 베트남에서는 써먹지 못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최근에는 베트남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어서 그런지 내가 점점 더 베트남 사람처럼 보이고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쌍꺼풀도 있고, 눈도 큰 편이라서 더 그럴 수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은 실제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길에 가만히 서있으면, 나에게 와서 베트남어로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가끔 있는 편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다가, 또는 차를 타고 가다 멈춰 서서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나에게 베트남 말을 걸어오는데, 내가 외국 사람이라 베트남어를 잘 모른다고 하면 엄청 놀라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회사에서 한국어 통역을 하는 베트남 직원은 종종 한국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언어를 배우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나라의 느낌이 베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업무상으로 베트남의 국내선 비행기를 종종 이용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하노이로 출장 갈 일이 생겨서 베트남 항공의 비행기를 탔다. 호치민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는데, 카운터에서는 내가 사전 예약한 좌석을 취소시키고 비상구 쪽으로 다시 잡아주었다. 뜻밖의 행운을 누리게 된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카운터의 직원에게 베트남어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널찍한 좌석을 배정받고선 기분 좋게 비행기에 탑승하기 시작했고, 푸른색의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승무원들은 기내 출입구에 서서 한 명씩 표를 검사하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오자이가 보기엔 예쁘지만 일할 때는 불편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워낙 베트남을 대표하는 옷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베트남을 알리기 위해 승무원의 유니폼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행기 복도에 서있는 여자 승무원은 날 보더니 "신짜오(Xin chào 안녕하세요)."라며 간단히 베트남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원어민스럽게 "신짜오, 깜언 뉴(Xin chào, Cảm ơn nhiều 안녕하세요. 매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베트남 사람처럼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쭉 복도를 따라 들어가 상대적으로 넓은 비상구 좌석에 앉았고, 창밖의 공항 풍경을 보며, 또 입장하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안전벨트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까 나에게 인사를 건넸던 승무원이 내 자리를 향해 걸어왔다. 비상구 좌석에 대한 주의사항과 비상시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안내를 하려고 오는 것일 게다. 그전에도 여러 번 비상구 좌석에 앉아봐서 내용은 다 알고 있다. 여기는 비상구 좌석이고, 비상시에는 승무원을 도와서 비상구를 열고 승객 탈출 업무를 보조해야 한다는 말을 할 것이다. 또 자세한 내용은 좌석에 있는 안내문을 참조하라는 말도 할 것이고, 마지막엔 이에 동의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알겠다고만 하면 된다. 완전히 긍정의 대답을 할 준비를 마친 채 귀를 열고 적극적인 영어 듣기 평가를 대비한 스탠바이 상태에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승무원의 완벽한 베트남어가 내 귓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승무원들이 늘 영어로 안내를 해줬는데, 아까 탑승할 때의 내 베트남어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는지 이 승무원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베트남 사람으로 간주하곤 베트남어로 빠르게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상당 부분은 못 알아들었지만, 난 가만히 앉아 미소를 지으며 승무원의 눈을 바라보면서 중간에 호응하는 듯한 추임새도 넣었다가 마지막엔 "야, 안 비엣 로이(Dạ, anh biết rồi 네, 알겠어요)."라며 깔끔하게 성조를 지킨 대답까지 해주었다. 역시 베트남어를 배워서 그런지 말 자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흡사 원어민간의 대화 리스닝 샘플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승무원도 한 가지 업무를 마쳐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속일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무원이 속았다. '내 베트남어가 이렇게 발전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하다가 중간에 간식으로 빵과 음료를 나눠주었다. 이륙 전부터 다리를 쫙 뻗고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서 졸고 있다가 음료 선택을 물으러 내 앞으로 온 아까 그 승무원에게 "코크, 플리즈."라고 말을 했다. 승무원이 놀란 표정이다. 베트남 사람이라면 코크라고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는 콜라를 말할 때 코카콜라의 앞글자만 따와서 '꼬까(Coca)'라고 한다. 놀란 승무원이 날 바라보며 베트남 사람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괜히 스파이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인 것인 양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자백)을 했다.
그러더니 내 앞으로 한걸음 옮겨와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베트남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고,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베트남 사람인 줄 알고 베트남말로 비상구 안내를 했는데 다 알아들었냐고 다시 묻는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비상 상황이 되면 꼭 돕겠다고 영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 의자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것은 아니고 반쯤 허리를 숙여 나에게 말을 하다 말고 웃으면서 쪼그려 앉았다. 아마도 나를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남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어떤 배신감 같은 게 들었나 보다. 어쩌면 본인이 눈썰미가 이렇게 없었나? 하는 자괴감일 수도 있겠다.
베트남어를 배워서 그런지 나에게서 자꾸만 더 베트남 사람 같은 느낌이 나는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싫다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사실, 처음에 베트남 사람 같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다. 일을 하기 위해 베트남에 막 들어올 무렵에 한국에서 나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쳐 준 베트남 선생님이 얘기했다. "언뜻 보면 베트남 사람같이 보여서, 베트남에 가시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베트남 사람들이 친근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동남아의 그 느낌이 나에게 있다는 소리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단 말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생각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베트남어 수준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완전히 현지인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승무원도 속아 넘어갈 정도의 발음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쯤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다. 이번에도 꼬까(Coca)에서만 걸리지 않았으면,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승무원을 속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베트남에 살면서 공부하다 보니 애정이 생긴 것인가 싶기도 하다. 타오 선생님이 3년은 배워야 써먹을만한 베트남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아직은 조금 더 배워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