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당의 우리 반 여섯 명 중에서 수업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일본 사람 시마타이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수업에 올 때마다 늘 내 오른쪽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는 또래의 중년 남자인데, 굵고 괄괄한 목소리로 선생님의 질문에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 있게 대답을 이어간다. 종종 일본어로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는 그는 거의 검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서 등을 여유 있게 의자에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수업을 듣는다. 비록 그가 대답하는 것 중에 오답의 비율이 적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나머지 학생들의 자신감 회복에 도움을 주고 있기에 고마운 동급생이라 생각하고 있다.
오늘 수업에선 한 단원이 마무리되었고, 베트남어 교재에는 평가 문제를 푸는 시간이 있었다. 문제를 풀고 나서 선생님은 여섯 명의 학생들이 돌아가며 한 줄씩 읽도록 시켰는데, 그러다가 시마타의 발음이 살짝 신기했나 보다. 시마타가 교재에 있는 예문 중에 시드니(Sydney)에 가야 한다는 문장을 읽은 부분에서 피식 웃었다. 타오 선생님은 곧바로 질문을 했다. "시마타, 일본에서는 시드니를 뭐라고 부르나요?" 그러자 시마타가 '시두니'라고 한다며 대답했고, 선생님은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죠?", "한국에서는 '시드니'라고 발음하죠.", "그래도 일본과 베트남에서 발음하는 것보다는 한국에서 발음하는 것이 영어랑 더 비슷한 것 같네요. 베트남은 '싣(으)니'라고 해요. 하하하." 타오 선생님이 베트남식으로 시드니 발음을 하며 너무 환하게 웃는다. 나도 알고 있다. 베트남에선 단어 중간에 있는 자음들은 거의 날려먹듯 발음하기 때문에 시드니의 '으'발음이 들릴 듯 말듯하게 발음한다. 어쩌면 시드니라기보다는 '싣니'정도로 발음하는 것 같다.
처음 베트남에 발령받아 왔을 때, 회사의 총무 직원이 영어로 뭔가 질문을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세히 여러 번 물어보니 나에게 '빡뽓'이라는 것을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빡뽓이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종이에 적어달라고 했다. 충격적 이게도 이 단어는 패스포트(passport)라는 글자였다. 발음을 할 때, 가운데 있는 자음들이 다 날아가는 식으로 줄여져 버렸다. 요즘에는 베트남식 영어 발음에도 익숙하다. 이제 빡뽓을 달라고 하면 가방을 열어 여권을 척척 꺼내주기도 하고, '딱씨'를 타야 된다고 하면 택시(taxi)를 바로 부를 수도 있다.
베트남어 교재 중 시드니가 나왔던 페이지
오늘도 타오 선생님과 나라별로 다른 영어발음을 나누며 즐거운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 모두 "선생님 고맙습니다(Cảm ơn cô 깜언 꼬)."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시마타가 다른 말로 인사를 했다. "누나 고맙습니다(Cảm ơn chị 깜언 찌)."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부끄러운 듯 흠칫 놀라며 웃었다. "나한테 누나(chị 찌)라고 하지 마세요." 아마도 시마타가 생각했을 때 고모로 번역되는 꼬(cô)나 누나, 언니라고 번역되는 찌(chị) 모두 윗사람인 여자를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말했을 수 있다. 그 중에 고모 보다는 누나가 더 친근한 것이라 생각하여 불렀을 것이다. 한국어로 들었을 때도 고모보다는 누나가 더 친근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베트남에서 이 '꼬(cô)'라는 단어에는 여러 뜻이 있다. 원래 의미인 고모라는 뜻도 있지만 젊은 여자(Miss)라는 뜻이 있기도하고, 특히 여자 선생님(cô giáo)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도 있다. 그래서 타오 선생님은 자기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누나라고 부른 말에 조금 부끄럽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베트남에 살다 보니, 한국어로 번역되는 말과는 그 느낌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단어들이 꽤 있음을 알게 된다. 아마 문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단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단계를 거쳤는지에 따라 같은 뜻의 단어라고 하더라도 뉘앙스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돌이라는 것과 얼음이라는 말이 베트남에서는 '다(đá)'라고 하는 같은 단어인데, 아마 물질의 성분보다는 단단한 것에 더 주안점을 두어 두 개의 단어가 서로 같은 글자를 쓰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얼음이나 돌을 말할 때 한국인과는 다른 뉘앙스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런 상황의 연장에서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기도 하는 장면이 있다. 베트남에선 상대에게 말을 걸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부르는 인칭대명사를 붙여야 하는데, 상대를 부르지 않으면서 말을 하게 되면 좀 딱딱한 투의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단순히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하지 않고 상대방을 언급해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형님 안녕', '동생 안녕', '친구 안녕'과 같이 상대와 나의 관계를 알고 불러줘야 한다. 그래서 식당에 가면, 여자 종업원들이 '오빠, 안녕하세요(Chào anh 짜오 안).'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날 오빠라고 부르는구나.'라며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본인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서 예의를 차려 오빠라고 한 것이지, 한국 남자가 심쿵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씩 따지고 보면, 외국어로 정확히 맞는 뜻의 한국어는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석할 수는 있지만, 이 오빠는 그 오빠와 느낌이 다른 것이듯, 다른 단어도 그러할 것이다. 단어와 단어의 비교만 해도 이런 차이가 있는데, 한 문장에는 얼마나 다른 뉘앙스가 숨겨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 외국어로 된 시와 같은 문학은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언어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담겨 있다. 수십 년,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며 공감하고 농축된 발음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그 나라의 문화를 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AI가 외국어를 번역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막 이러한 기술이 보급화되기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AI가 얼마나 놀랍고 편리한 미래를 가져다줄지 가늠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나라의 문화를 모르면, 그 느낌까지 정확히 번역될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더 꿋꿋이 외국어를 배운다. 적어도 AI보다는 그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