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작정을 하고 일찍 퇴근한 뒤에 집에서 빠르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오늘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그러니까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어학당엘 다니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제 어학당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고 다음날인 오늘부터 수업에 참석하게 되는 것인데, 연초 계획했던 일을 바로 시작해야 잊지 않을 것 같아서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마자 감색의 얇은 트레이닝 바지를 챙겨 입고, 아이보리색의 라운드 티셔츠를 걸치는 간단한 옷차림으로 아파트 1층의 과일가게 앞에서 택시를 부른다. 회사에 다니며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 대신 어디선가 공짜로 받은 조그만 에코백에 베트남어 교재와 펜을 넣고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정말 학교에 가는 느낌이 난다. 평소라면 구글맵에 나오는 주소를 보여주며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렸을 텐데, 오늘은 굳이 베트남어로 발음하며 목적지를 말했다.
"호치민 인문사회대학교로 가주세요(Anh ơi đi trường Đại học Khoa học Xã hội Nhân văn Hồ Chí Minh đi)."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연습했더니 발음이 생각보다 자연스럽다. 직역하면 '형님 호치민 인문사회대학교로 갑시다.'이지만 베트남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의례적으로 형, 동생을 따져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생각하는 정도의 진짜로 아는 형님이라는 의미는 없다. 그렇게 잘 모르는 형님이 운전하는 흰색의 도요타 이노바 택시에 타게 되었는데, 문을 열 때 살짝 찌걱 소리가 나는 정도의 연식을 가진 비나선 회사의 택시였다. 레몬그라스와 쌀냄새 같은 것이 섞여있는 택시의 뒷자리에 앉아 에코백을 옆자리에 던져두고는 검은색 갤럭시 버즈를 귀에 꽂고서 유튜브에서 선택해 주는 시티팝 믹스 음악을 재생시킨다. 요즘의 호치민은 몇 달째 비가 오지 않는 건기라서 날이 덥다. 저녁이 되면 시원해지기 마련이지만, 이제 막 어둑어둑해진 호치민의 길거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서 택시의 창문에 닿은 손등이 따뜻하다.
바로 며칠 전에 설날 연휴가 끝나서 그런지 시내에는 아직도 설 명절 장식들이 화려하게 불빛을 밝히고 있다. 다행히 오늘까지는 사람들이 고향에서 많이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까딱하면 오토바이로 가득 차서 40~50분가량 걸릴 수도 있는데, 오늘은 어학당이 있는 호치민 인사대(인문사회대학교)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호치민의 야경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꽤 다르다. 이미 유명한 베트남의 정신없는 오토바이 무리를 제외하더라도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색깔 자체가 한국과는 다른 것 같고, 이런 불빛들을 눈이 아플 정도로 도로에 깔아 놓았다. 사이공강의 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초대형 LED 전광판과 다리 난간에 있는 쨍한 원색의 불빛들이 강렬하게 눈으로 들어와 꽂힌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정말 새파랗고 샛노란 색깔들, 또 새빨갛고 샛초록한 불빛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확실히 베트남이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된다.
호치민 시내의 야경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치민 인사대학교는 생각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생각하면 큰 교문과 넓은 부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호치민에 있는 대학교는 각 단과대학별로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있기 때문에 '이게 학교였어?' 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이 대학교의 어학당을 다녀본 경험이 있기에, 나는 택시기사에게 학교의 정문에 내리지 말고 오토바이 주차장이 있는 쪽문에서 하차해 달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오토바이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어학당 입구에서부터 내가 수업을 들어야 하는 3층까지 막힘없이 걸어 올라간다. 베트남의 1층은 한국 기준으로 2층이기 때문에 3층이라 함은 한국 기준으로는 4층에 해당하지만, 너무나 느린 엘리베이터를 알고 있기에 그냥 걷기로 한 것이다. 강의실 앞에 오니 8년 전 처음 베트남에 와서 들었던 초급반 강의실과 같은 곳이었다. C-304호실, 강의실 앞에 도착하니 몸이 익숙한 듯 기억해 낸다. 오랜만임에도 이 강의실을 기억하고 있음을 신기해하며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Xin chào!(신짜오, 안녕하세요)"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여자 선생님과 같은 반의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선생님의 이름은 '타오'라고 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물어보길래 민수라고 대답했더니 수업시간 내내 '민주'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도 나쁘지 않아서 그냥 여기서는 민주라 불려지기로 했다. 수업 진행하는 것을 보니 타오 선생님은 무척 활달한 성격이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문 하나를 만들 때도 '더 재밌는 문장으로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날 선생님이 만든 예문 중에 제일 좋았던 것은 '만일 내가 바퀴벌레를 본다면, 나는 ~~ 할 것이다.'였다. 학생들이 만든 문장에 맞춰 바퀴벌레를 때려잡고, 도망가고, 스프레이 뿌리는 동작을 선생님이 직접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다 보여주었다. 타오 선생님과 함께 웃으며 수업을 듣는 우리 반의 학생들은 나까지 모두 6명이었는데, 3명은 일본 사람이고, 나를 포함한 2명은 한국인, 또 나머지 한 명은 필리핀 사람이다. 이 필리핀 사람 엘레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들이었다.
수업 중 대화 연습시간에 나는 일본사람 히로와 짝이 되었는데, 그는 30대 초반 정도로 되어 보이고 마른 체격에 검은색의 정장 바지와 흰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설 연휴에는 어디에 다녀왔는지, 일본에서 무얼 하며 연휴를 보냈는지, 비행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와 같은 것들을 물었고, 반대로 히로의 비슷한 물음에 대답을 해주었다. 서로 웃으며 틀린 것을 지적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선생님에게 모르는 단어에 대한 질문도 이어지는 재밌는 시간이었다. 회화 연습을 마치고 나서는 대학교 때 다녔던 영어 회화 학원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땐 선생님이 질문 하나만 해도 뭐가 그리 긴장되어 대답하느라 쩔쩔맸던 건지 모르겠다. 당시엔 막연한 긴장과 압박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 배우고 있는 베트남어에 대해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이런 기분으로 과거에 영어를 배웠으면 더 재밌게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가 가벼워져서인지 잘 모르겠으나, 수업에 임하는 태도나 선생님을 바라보는 정도가 이전과는 달라져있음을 느낀다. 이런 것을 연륜이라 부르는 것인가 싶기도 한데, 연륜이라는 단어 자체가 늙어 보여 사용하기는 조금 꺼려지긴 한다. 어쨌든 마흔이 넘어 다니는 어학당의 분위기는 경쾌했다. 수업에 열정을 바치고 있던 타오 선생님은 힘든 명절을 막 끝내고 왔으니까 오늘은 10분 정도 빨리 수업을 끝내자고 한다. 그러다 일찍 끝내는 것이 미안했는지 베트남 사람들은 10분이나 20분 정도는 지키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고 웃으면서 '베트남 타임'이라는 단어도 소개했다. 학창 시절에 자주 얘기하던 코리안 타임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목요일에 만나요." 라며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과 인사하고 어학당을 나서자 호치민 인사대의 학생들 10명 정도가 공터에 모여 K-Pop 음악을 틀어놓고 보기 좋게 댄스 연습을 하고 있다. 천천히 걸으며 잠시 구경을 하다가 수업이 10분 일찍 끝난 만큼 나도 10분간 시내를 걸은 후 택시를 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