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이던 시절, 시내의 한 백화점 앞 버스 정류장에 서서 내가 탈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려 해서 날이 더워지고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그늘에 서 있으려 노력하던 중에 정장 차림의 한 젊은 남자가 다가와 공손히 말을 걸어왔다. "OOOOOOO 스까?" 내 나이 이십 평생 길거리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는데, 어쨌든 이것은 분명 한국말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웠으나 문장의 끝에 있는 "스까?"를 듣고선 일본어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반응이 없었을 터인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심을 보이자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OOOOO 이꾸라데스까?" 이제 이 남자의 말을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와! 이거 일본어 맞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격이 얼마인지를 묻는 '이꾸라데스까?(いくらですか?)'라는 말을 했으니, 아마도 버스요금이 얼마인지를 묻는 것 같았고, 내가 "뻐스! 이꾸라데스까?"라고 대꾸하자 이 남자는 웃으며 맞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자신 있게 "고햐꾸엔데스(500円です)."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남자는 감사하다며 '아리가또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를 외치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마음이 뿌듯해졌다. 대학교에 들어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하고 몇 달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일본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다음에 학교에 가면 일문과 친구에게 자랑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고, 버스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그 남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잘못한 것이 떠올랐다. '와! 미쳤다. 여기 한국인데 500 엔이라고 대답해 줬네.' 일본어로 물어봐서 그냥 자연스럽게 '원'이 아니라 '엔'이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었다. '설마 5천 원을 낸 것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어려서부터 많은 언어를 배웠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장 오래 배운 영어,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있는 언어이다. 배우면서 무척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배운 언어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쉬운(?) 언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독일어를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제2외국어로 배운 언어였다.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고, 배우던 당시에도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언어이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제2외국어를 선택하라고 할 때 대부분은 본인이 고등학교 때 배웠던 제2외국어를 선택했지만 나는 일본어로 바꿔서 선택을 했다.
그러고 나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니, 회사는 내가 중국법인으로 파견을 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사팀은 직접 내 이름을 적어서 이메일을 보내왔고,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시켜주는 중국어를 배우며, 또 따로 독학으로도 열심히 배웠다. 아예 HSK 시험을 치면서 중국 파견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더니 회사는 나를 중국이 아닌 베트남으로 파견 보냈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으나, 베트남에 오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와서 대학교에 있는 어학당에도 다녀보고 과외도 받으며 지냈지만, 결국엔 베트남 현지 직원들과 베트남어가 아닌 영어로 힘겹게 대화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학교를 다니는 내내 영어 또는 영어와 함께 다른 언어를 공부했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승진 때마다 토익점수를 내고, 또 중국어 공부에 베트남어 공부까지 쉰 적이 없으니 외국어와의 인연이 꽤 질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왜 조그만 나라 한국에 태어나서 이렇게 항상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탄을 해보았던 적도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권 나라에 태어났으면 그냥 영어 하나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텐데, 이게 웬 고생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 태어난걸.
베트남이라는 외국에서 일을 하다 보니 외국어에 대한 중요성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크게 생각한다. 모든 직원은 베트남 사람들이고, 또 가끔은 다른 나라에서도 거래를 위해 우리 회사에 방문하기도 하기 때문에 업무를 위한 영어도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정말 다양한 발음의 영어가 서로 엉겨지며 일을 하는데, 모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무언가 작업이 수행되며 물건이 주문되고 한다는 것이 어떨 때는 놀랍기도 하다. 이래서 철자를 말한다는 뜻의 영어 단어 스펠(Spell)에는 마법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것 같다. 제대로 말하면 마치 주문을 외운 것처럼 상대방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베트남에 살고 계시니까, 이제 베트남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라며 질문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가벼운 대화 수준만 가능하다. 베트남에 살고 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러한 수준이긴 한데, 여섯 개나 되는 베트남어의 성조를 지켜 발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진도를 빼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배워 베트남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도 성조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호치민 대학교의 어학당에 등록한 뒤 초급반을 떼고 나서, 중급반으로 넘어가다가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다.
이제 베트남에서 8년째 지내고 있다. 곧 10년을 채울 수도 있는데, 인생의 거의 10%를 베트남에 살면서 베트남어 초급 실력으로만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배워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주문을 마법처럼 걸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