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백 변호사는 일주일간 한국 출장을 갔다. 한국에 가서 우리 회사의 관리 임원도 만나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 사이에 나는 리우(Lieu) 변호사와 업무를 본다. 중간 미팅을 위해 호치민 시내의 한 카페에서 광야의 리우(Lieu)를 만났다. 그녀는 검은 정장 바지에 실크 느낌의 검은 블라우스를 입고서 카페 앞에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카페의 현관에서 만나 악수를 한 뒤, 유리문을 열고서 살짝 어두운 조명의 카페로 들어갔다.
시내의 카페라서 그런지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있다. 이런 큰 카페는 오랜만에 와보기도 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실내의 흰 벽에는 흑백 인물 사진들이 액자에 걸려있고, 각각의 사진을 비추는 작은 핀 조명이 액자마다 하나씩 천장에 달려있다. 이제 조금 높은 의자가 있는 바 타입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나서 간략한 사건의 진행 경과와 백 변호사의 출장 복귀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대화하기에는 카페의 음악이 다소 크게 들린다. 전에 둘째 아들이 말했던 그런 종류의 음악이다. 학교의 서양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마다 항상 틀어서 지겹다고 했던 종류의 리듬감 있는 최신 팝 음악이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큰 목소리로 로비 자금을 돌려받은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백 변호사님 통해서 돌려준 로비 자금은 잘 받았어요. 정말 신기하네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웃으며 서비스로 나오는 아이스 녹차(Tra Da)가 담긴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리우 변호사님이 저희 사건에 신경을 많이 써주신 덕분이에요." 백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리우(Lieu)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이 자금을 다시 돌려받아 왔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이렇게 다시 돌려받은 건 저도 처음이에요. 다만, 앞으로 사건을 해결하다 보면 자금이 다시 필요할 수도 있겠죠." 그녀는 원목 테이블 위의 종이로 된 컵받침에 올라 있는 망고 스무디를 살짝 옆으로 밀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저희도 준비하고 있어야죠. 알겠어요." 나는 베트남식 연유 커피가 담긴 투명한 유리잔의 얼음이 녹을 수 있게 티스푼으로 천천히 잔을 저으며 대답했다. 티스푼이 냉동실에 있다가 나왔는지 손가락이 차갑다.
"최근에 저희는 법원하고 검찰청 사람들을 계속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 사기꾼 직원들, 융(Dung)하고 르엉(Luong)도 지금 판사들한테 접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요. 판사들에게 이 재심 청구를 기각시켜 주거나 본인들이 유리하게 손을 써주는 경우에, 그 결정을 내린 판사에게 승소 금액의 30%를 지급하겠다고 말을 흘리고 다닌답니다. 자기들 돈 아니라고 크게 지르고 다니는 것 같아요." 리우(Lieu) 변호사는 본인이 다른 변호사들에게 들은 정보라고 한다.
"13%가 아니고 30%씩이 나요? 우리는 그렇게 로비할 수 없잖아요. 우리 회사 돈인데 지켜야죠." 음악 소리에 혹시 내가 그녀의 영어 발음을 잘못 알아들었을까 봐, Thirteen(13) 인지 Thirty(30) 인지 다시 확인했다.
"네 Thirty(30) 맞아요. 이것만 봐도 그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한국 영사관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계산기엔 ‘30’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그리고, 백 변호사님한테는 얘기 들으셨죠? 지금 제가 영사관에서 보낸다는 공문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완료되면 베트남어와 영문 번역본으로 전달해 드릴게요. 회사에서도 필요한 내용은 도와주셔야 돼요. 법인장님이 회사 직원들에게 최대한 빠르게 협조해 달라고 요청해 주세요."
"네. 당연하죠. 저희가 당연히 변호사님 도와드려야죠."
“영사관에서 준비하는 서류는 중앙 정부기관에도, 각 성의 정부기관에도 동시에 발송될 거예요. 그리고 법원, 검찰, 공안에도 함께요." 나는 이때 그녀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읽었다. "또 외교적으로 이슈를 만들어야 해요. 소문이 날 수 있게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이 사건에서는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죠. 그래야 그들과 로비 경쟁을 피할 수 있어요." 리우(Lieu)는 흰색 종이 빨대로 샛노란 망고 스무디를 한 모금 마셨다.
"또 이 나쁜 놈들을 형사 사건으로 엮어서 감옥에 빨리 넣어야 해요. 그래야지 재심을 담당하는 판사도 1심 판결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법원에게 명분을 주어야 해요. 1심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명분이요. 여기서는 그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만들어줘야죠. 이들이 사기꾼이라서 감옥에 들어간다는 걸 빨리 보여줘야 합니다." 리우(Lieu)는 이 부분에서 목소리를 조금 높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빨리 사건이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있어요. 영사관에서 서류가 바로 나오면 좋겠네요. 참, 그리고 이건 큰 건 아니지만, 제 마음입니다." 나는 브라운색 박스에 담겨있는 설화수 화장품 세트를 전달했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그래도 나는 굳이 그녀의 손에 상자를 쥐여주었다. "정말요? 이거 엄청 비쌀 것 같은데요." 그녀가 상자를 내려다보며 주저한다. "괜찮습니다. 받아주세요."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그녀가 앉은 테이블 앞에 상자가 놓이는 것을 확인했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그런데 법인장님, 지난번에는 정말로 저 못 알아보셨어요? 저는 처음 만나서 바로 아는 체하려고 했는데, 아예 아는 척을 안 하시니까." 그녀는 테이블의 선물을 본인 옆자리 의자에 올려놓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진짜 못생겼나 봐요. 그렇죠? 서운했어요."
"당시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알아채지 못했어요. 이번 사건 진행하면서, 리우(Lieu) 변호사님하고 백 변호사님은 정말 하늘에서 날 도와주려고 보내셨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의자로 옮긴 화장품 박스를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법인장님 큰 아들하고 제 딸하고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도 기억하는데. 요즘 우리 딸은 한국 영화랑 노래에 빠져서, 꼭 한국 남자 만나보고 싶다고 하거든요, 나중에 아드님 한번 소개해주실래요?" 리우(Lieu)가 웃으며 망고스무디가 담긴 높은 유리잔을 들어 올린다.
"네, 제가 아들 꼭 소개해 드릴게요." 나는 연유커피가 담긴 유리컵을 만지며 웃었다. 이제야 웃음이 나고, 이제 일상의 대화가 나오기 시작한다. 새삼 무너지던 마음이 추스러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혹시 법인장님이 회사의 오너분과 가족 관계이신가요?" 리우(Lieu)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네? 아니에요. 전혀 남남입니다. 그런데 같이 오랫동안 일을 하기는 했죠. 왜요? 제가 오너와 닮았나요?"
"그럼, 법인장님은 그냥 직원이시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본인 회사인 줄 알았어요. 너무 놀라시고, 또 울기도 하시길래요." 난 손사래를 쳤고, 그녀는 다시 웃는다. "그러면, 법인장님은 이 회사에서 좀 계시다가 또 돌아가실 건데 이 사건으로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딱 봐도 사건 자체가 너무 이상하잖아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건인데, 상식선에서 일이 잘 풀릴 겁니다."
"네, 그럴게요."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속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핀 조명을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나는 눅눅해진 종이 빨대를 나무 테이블에 올려놓고 유리잔을 들어 똑똑 점성 있게 떨어지는 연유커피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놓았다.
이제 카페의 커다란 유리문을 열었다. 카페에서 내내 듣고 있던 음악소리가 작아지고 시내의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정말 일상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나 보다. 쏴-아하며 쏟아지는 빗소리도 함께 들렸다. 현관의 커다란 팜트리에 떨어지는 비에서는 청량함이 느껴진다.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하고 카페의 입구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요즘엔 매일 한 번씩 비가 내린다. 우기에 접어든 것이다. 얼마 전 그 우울하고 마음이 무너지던 느낌은 이제 조금씩 씻겨 내려가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튜브 앱을 실행시켰다. 이제 우울증에 대한 동영상이 조금 적어지긴 했다. 역시 알고리즘이 나를 제일 잘 알고 있다. 잔잔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그 분위기를 느끼고 있다. 이번엔 그들이 다급해질 차례다. 재심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들은 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한국 영사관의 압력과 상급 기관인 중앙 정부의 공안, 검찰, 법원이 움직이면, 그들이 질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오랫동안 눅눅했던 공기가 바뀌고 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지만, 이번엔 방향이 다르다.
이제 그들은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반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