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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Nov 12. 2023

후회로 가득한 하루키와의 만남

무라카미 하루키의 집을 찾아가던 날 이야기

"아저씨! 무라카미 하루키네 집으로 가주세요."


"학생! 학생! 어디에 가자고?" 택시 기사가 뒷자리의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잘 못 알아들을 것으로 짐작했는지, 학생을 두 번이나 말했다. 처음은 짧게, 두 번째는 길게 나를 급하게 불렀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던 택시 기사는 꽃을 들고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이상한 듯 쳐다봤다.


"아니, 거기 있잖아요. 하루키네 집. 거기로 가자니까요?" 생각해 보면, 아마 혀가 꼬여서 기사분께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을 수도 있겠다. 난 술에 너무나 취해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택시 기사분이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안경 자체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술에 취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날 보며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안고 있는 꽃을 보며 얘기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택시 기사는 일단 골목길에서 출발했고, 천천히 운전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자동차 전방과 내가 앉아 있는 뒷자리를 반복하여 바라보면서 묻고 있다.


"도쿄. 도쿄에 있잖아요. 몰라요? 하루키는 도쿄에 사니까. 당연히 일본에 있는 도쿄로 가야지요." 택시 기사의 말투를 따라서 도쿄. 도-쿄를 짧고 길게 한 번씩 발음했다. 재밌게, 또 공손히 알려드리려 했지만, 기사님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아마 죄송스럽게도 내 말과 태도에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한창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져있었다.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한 권씩 사들이다가 그렇게 집에 있는 책장을 다 그의 책으로 채웠다. 내 친구는 말했다. "네가 추천해 줘서 읽어봤는데 재미는 있거든. 근데, 교훈이라던지 어떤 의미 같은 건 없는 것 같아.", "뭐 그렇게 그냥 재밌게 읽었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교훈 말고 재밌는 느낌을 얻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꼰대처럼 가르치려들긴 싫어서 이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하루키에 빠져있던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첫 생일. 내 생일은 항상 수능일과 비슷하게 겹친다. 내가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그 해에도 수능 다음 날이던 그날(하루키를 만나던 날)은 내 생일이었다. 낮에만 해도 생각보단 날씨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저녁이 되니 꽤 쌀쌀하다. 날씨에 비해 얇은 옷을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감기에 걸려도 상관없다. 내일만 지나면 다음날은 토요일이다.


이른 저녁부터 친구들과 모여 선물을 받고 술을 마시기 시작해 술게임도 종류별로 한 바퀴 돌아갔다. 이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다. 정확하게는 술은 아까부터 계속 마시고 있고,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들은 소주방에 앉아있다. 2개의 테이블과 4개의 소파를 붙여 놓았으니까 8명가량이 모였던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난 하루키 얘기도 조금 했다. 친구들이 책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려 김희선, 소지섭, 홍진경 같은 동갑내기 연예인 얘기로 넘겼다. 우리 중에 한 명이 친구들과는 다른 의견으로 홍진경이 제일 예쁘다며, 홍진경과의 결혼을 위해 유명해지고 싶다면서 엄청난 연설을 해댔던 것이 기억난다.


살짝 어두운 실내와 작은 불빛들이 반짝거리던 소주방에는 검은색 조끼(붉은색인가?)를 입은 남자 종업원들이 레몬소주와 안주를 들고 계단을 뛰어넘어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터보, 영턱스클럽, 룰라 같은 가수들의 빠른 최신 음악은 계속해서 들려댔다. 우린 알탕, 쏘야, 골뱅이 무침 같은 안주를 먹으며 겨울 방학이 되면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쪽 끝이 소란스럽다. 친구 둘이서 싸웠다. 나는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인조 가죽 소파의 가운데 앉아 왼쪽 팔꿈치를 팔걸이에 걸치고 있었고, 내가 앉은 쪽 테이블의 4명과 신나게 대학교의 첫겨울 방학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 왼편의 마주 보고 있는 또 다른 2개 소파의 끝자리에 앉아있던 여자애들 둘이서 말싸움이 났다.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술이 취해서 그랬을 것이다. 우린 대학교 1학년이었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술부심을 부리며 그저 많이 마시면 좋은 줄 알고, 무턱대고 마시기만 해댔던 것 같다. 그 여자 친구들의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이 말리기 시작했지만,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다 그중의 한 명이 숟가락을 던지듯 플라스틱 테이블에 내리꽂았고, 이내 소리를 내며 회색의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아니면 붉은)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빠르게 우리 테이블로 왔는데, 곧바로 싸우던 여자 친구 한 명이 일어나며 다른 한 명의 뺨을 때렸다. 친구들과 종업원 일어서있는 두 명의 여자 친구들에게 순간적으로 집중했고,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K-드라마를 직관하게 되다니. 우리 테이블에선 소리가 크게 났고, 난 그날 선물로 받은 것 중에 꽃다발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나 집에 갈게." 싸우고 있는 애들의 반대 방향으로 해서 테이블 밖으로 걸어 나왔다.


"왜? 네가 가면 어떡해? 좀 앉아 있어 봐." 친구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렸고, 내 어깨를 붙잡으며 다시 앉히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난 술에 취했다. 테이블 구석에 놓인 두세 개비 정도 들어있는 구겨진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담배를 싸고 있는 비닐에는 테이블에 흘린 레몬 소주가 달라붙어 끈적거린다. '얼마 안 남았네.' 난 평상시라면 하루 종일 피울 만큼의 담배를 술을 마시면서 이미 거의 두 배는 피워버렸다.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면 자제력이 없어져서 그런지 훨씬 많은 양을 피워댄 것 같다. 다음날 머리가 아플 것은 더욱 확실해진다.


"아니, 나 집에 가고 싶어." 난 친구를 밀치고 카운터를 지나쳐 걸어 나가 기다란 나무 손잡이가 달린 유리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바람이 세게 불고 있었고, 소주방  앞에는 택시가 한 대 서있었다. 얼른 달려가 뒷자리 문을 열고 올라탔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손이 시렸다.


친구들이 달려와 택시의 창문을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그중에 한 명은 내 선물들을 종이백에 담아 들고 있었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 주세요." 차는 일단 출발해서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날이 추웠다.


"학생! 어디로 가는 거야?" 운전기사가 묻는다.


"아저씨! 무라카미 하루키네 집으로 가주세요." 이미 취해버린 나는, 뒤에서 날 부르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학생! 학생! 어디에 가자고?" 택시 기사가 뒷자리의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아니, 거기 있잖아요. 하루키네 집. 거기로 가자니까요?" 좀 전까지 말짱한 것 같았는데, 혀가 좀 꼬이는 기분 든다. 사실은 그전부터 말짱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택시 기사는 답답해서 다시 물었겠지만, 난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차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택시 기사의 말을 귀찮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도쿄. 도쿄에 있잖아요. 몰라요? 하루키는 도쿄에 사니까. 일본에 있는 도쿄로 가야지요. 여기서 부산으로 쭉 가세요. 그리고 거기서 배를 타면 하루키네 집으로 간다고요." 나는 택시기사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예의 있게 대답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저씨는 하루키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구먼.'


라디오 소리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난 속이 울렁거렸다. 어쩌면 중간에 토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너무 졸렸던 것 같다. 차는 계속 움직이고 있고, 따뜻한 히터에 술 취한 몸은 긴장을 푼다. 나는 속이 좋지 않았고, 몽롱한 상태에 있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하루키를 만났다. 그는 도쿄의 한적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직접 찾아와 준 독자를 만나려고 현관문을 열어준다. 그는 생각보다 착했다. 책 표지에서 본 사진과 똑같이 생긴 날씬한 남자가 녹색 철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봐요." 그가 말을 걸었다.


난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눈이 떠졌다. '여긴 어디지? 도쿄인가? 아님 부산에 온 건가?'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전 인사를 하려던 하루키는 사라지고 기다란 검은색 비닐 소파에 반쯤 눕고 반쯤은 앉아 있는 내가 느껴진다. 뭔가 큰일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 학생! 정신 차려봐." 경찰이 나를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난 친구들과 헤어진 소주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파출소에 앉아있었다. 다행이다. 부산까지 왔으면, 부모님한테 맞아 죽었을 텐데... 바지 주머니 속에서 끈적이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다 찌그러진 담배를 꺼내 피우며 파출소의 검은색 비닐 소파에 기댔다. '미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없다. 잠시 후, 아버지가 파출소로 들어오셨다. 아마 파출소에서 내 신분증을 보고 아버지를 부른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불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날 데리고 파출소를 나오셨다. 그날 파출소를 나와 집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와 있었던 일은 여러분의 상상대로다. 훈훈하지는 아닌 방향으로...


다음날 아침, 집에서 눈을 떴다.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 일어났으면 밖으로 나오라고 하시는데, 못 들은 척 계속 누워있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것 같다. 아버지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 몇 번인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변기를 붙잡고 OTL 자세를 여러 번 취해야만 했었다. 웬 술을 그리 마셔댔는지 후회스럽기만 하다. 집에 콕 박혀서 여러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시내버스를 타고 나가서 병무청에 내렸다. 너무 창피해서 군대를 빨리 가버리고 싶었다. 그날 나는 병무청에 들어가 조기 입대 신청을 했다.


난 술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담배도 나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술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나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으로 밀어붙이기도 한다. 이 날 처음으로 술을 끊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택시 기사, 경찰관, 아버지, 친구들에게 모두 너무 창피하고 미안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자제력을 잃은 이 사건을 겪은 뒤에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의 다짐은 너무 약했나 보다. 다짐과 다르게 나는 점점 내게 좋지 않은 것들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금주 17일 차. 금주 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금주 후에 잠을 더 잘 자게 되는 것 같다. 수면 중간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나던 습관이 있었다. 자주 이런 상황이 있었기에 잠버릇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습관이 아니라 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요즘 들어서는 저녁에 누우면 아침에 눈을 뜬다. 잠을 자는 중간에 화장실 가려고 일어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당연한 것이 그전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음주는 체내의 수분 배출을 유도하기 때문에 야간뇨 증상을 만들 수 있다. 수면의 질도 저하시킨다고 한다. 24%나 수면의 질을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잠을 자면 몸의 피로가 충분히 풀리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부엌에 있는 위스키를 마셨던 행동들이 생각났다. 술을 끊으면 어떤 점들이 개선될 수 있는지 더 알아봐야 되겠다.


이제 돌아오는 주에는 내 생일이 있다. 올해도 수능일은 내 생일과 이틀 차이밖에 없다. 대학교 입학한 이후에 생일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올해에는 마시지 않게 될 것 같다. 이번엔 수능을 보기 전인 고3의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으로 생일을 보낼 생각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으며 와타나베와 함께 이번주를 지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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