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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Nov 26. 2023

교회에 가면 술담배 끊어지나요?

술, 담배 그리고 성장

전역 후 복학까지는 거의 일 년이나 남았다. 까짓 거 군대도 다녀온 마당에 뭔들 못하겠냐며 누르스름한 장판이 깔린 방바닥에 엎드려서 가로수, 교차로 같은 생활 정보지들을 주욱 펼쳐놓았다. 내년 Y2K의 새천년이 되면 밀레니엄 버그가 덮쳐서 온 세상이 망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당장 뭔가는 해야 되지 않겠나 싶다. 무엇보다 군대도 다녀온 다 큰 사람이 계속 용돈만 타 쓰는 것도 부담스럽다. 이제 주위에서도 나를 어른으로 보는 것 같고, 나도 거기에 맞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돈을 많이 준다는 곳 위주로 알아보자고 생각했다. 생활 정보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를 맡으며 꼼꼼하게 한 줄씩 훑으면서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한다.


주유소, 카페, 노래방 같은 곳은 별로 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막일처럼 몸을 많이 쓰는 일은 꾸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나름의 원칙을 세워두고선 돈을 많이 준다는 어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면접을 보러 갔고, 바로 다음날 아침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군대 다녀왔으면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면접의 주요 내용이었다. 난 새벽같이 봉고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에 있는 한 휴게소의 주유소에 내려 자동차 유리세정제를 팔았다. 이건 말이 유리세정제이지 왁스도 되었다가 흠집 제거제, 부식 방지제 또, 타이어 광택제까지도 되는 만병통치약 같은 제품이었다. '지이이익' 하고 옆으로 크게 문이 열리는 빛바랜 회색의 봉고차를 타면, 운전을 하는 실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당일의 판매 목표를 알려 주며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특수 지령을 받으며 임무가 배정되는 사람인 것 마냥 생각하며 즐겁게 일을 했다. 군대를 다녀오니 모든 게 재밌기도 했다.


이 만능 유리세정제를 팔기 위해서는 주유하는 1~2분 사이에 운전자를 꼬셔야 한다. 그리고 하루에 10개를 팔면 그 이후에는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돈이 생겼다. 난 제법 이 일에 재주가 있었다. 운전자가 놀러 가는 건지, 일하러 가는 건지는 대략 보면 알 수 있었고, 놀러 가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주유하는 동안 앞유리를 닦으며 기분 좋게 얘기를 좀 해주면 팔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고, 혼자서 보통 하루에 20~30개씩(정말 많을 때는 40개가량) 팔아댔다. 하루에 10개를 못 팔아서 일주일 안에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거의 70% 이상이었으니, 꽤 능력 있는 직원이었던 셈이다.


이 일은 주단위로 급여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날마다 술집에 모여 또래들의 공통된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친분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돈벌이가 괜찮아서 복학을 미룬 채 계속 이 일을 하거나, 실장님과 친해져서 다른 주유소를 개척하려고 하는 형들이 있었다. 나에게도 은근히 그런 말을 한다. '한 학기 더 쉬고 같이 하자.' 시간이 갈수록 나는 자꾸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원하는 방향의 성장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생각하고 준비했던, 내가 앞으로 뛰어야 할 필드는 여기가 아니다. 난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도서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Y2K가 되어도 밀레니엄 버그는 작동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복학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복학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엄습해 들어왔다. 복학 이후에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본격적인 나의 생업(평생 직업) 준비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막연하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거지?' 난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하고 삶을 설계할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꿈꾸던 멋진 일이지만, 또 무서운 현실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러한 두려움을 해소하려 매일같이 집 근처의 한 도서관에 나가서 자격증 공부를 했는데, 그런다고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목표와 비슷한 방향으로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은 가질 수 있었다. 하루는 도서관 근처의 중국집에서 점심으로 혼자 짜장면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지만, 이날은 생각이 깊어졌다.


회색의 시멘트 바닥으로 된 골목길과 담벼락 사이에 있는 전신주들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걷고 있다. 이제 정오인데도 날이 살짝 쌀쌀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때라서 도서관에 봄점퍼를 두고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다. 난 금방 점심만 먹고 들어올 생각으로 점퍼를 벗어둔 채 청바지에 흰 티, 그리고 그 위에 브라운 색상의 꽈배기 스웨터만 걸치고 나왔다. 골목길 중에서도 가급적 따뜻한 양달로 걸으려 노력하며 담배를 피운다. 그러다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잡은 담배를 검지 손가락으로 튕겨 골목 구석으로 날려 보내고 괜히 소매를 한번 툴툴 털어냈다. 스웨터가 좀 두툼해서 담배 냄새가 잘 배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시멘트 바닥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나왔다. 이 앞의 육교를 건너면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교회로 연결된다. '한번 가볼까?'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아마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예배당 안으로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컴컴한 예배당의 기다란 고동색 나무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영화에서처럼 조용한 예배당에서 거룩하게 기도하고 싶었는데(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한줄기 빛 사이로 비둘기도 좀 날아다니고),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유리창은 검붉은 색의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덕분에 사방이 새까맣게 깜깜해서 귀신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또 팔에 닭살이 돋아나기도 다. 나는 그렇게 10분도 채 되지 않아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라?' 신기하게도 교회 밖 주차장에는 고등학교 때 같이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 3~4명이 서있었고 반가운 마음으로 거의 5년 만에 그렇게 인사를 한 뒤, 그 주부터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급작스럽고 우연한 전개이지만, 실제 이렇게 됐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는 고등부 때 만났던 목사님과 재회할 수 있었다. 날 보자마자 너무 반갑다면서 꼭 안아주셨는데, 내 스웨터와 점퍼에 담배 냄새가 너무 배어있어서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술, 담배를 끊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죄책감만 더 커지고, 흡연이나 음주 횟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술친구가 더 늘었다. 교회 안에도 상당수의 청년들은 술, 담배를 했고, 예배 들어가기 전에 나와 함께 교회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교회에 들어갔던 친구(한 명이 아니란 얘기)도 있었다. 친해진 친구들끼리는 함께 술집에 다니기도 했다. 다들 취업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던 시기였으니까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 조언도 해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면서 자연적으로 술, 담배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한테 기도하면 바로바로 끊을 수 있게 되거나, 소원을 마구마구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건 나와 내 친구들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죄책감으로 회개하고 끊을 수 있게 해달라고 수차례 기도해도 그리 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준 너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니? 어때, 같이 얘기해 볼까?'라는 정도로 나와 함께 있는 분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넌 그전보다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니?  또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니?'라는 질문과 함께 주어진 삶을 옳게 살아내라고 하는 것 같다.


처음엔 매주 끊어보려 노력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또 실패했다고 회개하고, 다시 해보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번주엔 술집에 갔었습니다. 취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너무 취해버렸네요. 미쳤다고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담배도 끊으려고 해 봤는데 잘 되지 않아요. 끊을 수 있게 강한 정신력을 주세요.' 매주 반복되는 이 패턴이 지겨워질 때쯤에는 이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기도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 주에는 또 같은 상황을 대면할 것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강 때 무엇을 하면 좋겠냐는 당시 청년부 회장에게 지루하게 이상한 강사 초빙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게 금연, 금주 교육을 하자고 했다가 퇴자를 맞은 적이 있기도 했다. 청년부 회장은 청년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줄 몰랐을 거다. 같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서로 알고 있는 세계는 달랐다.


'한국 교회만 술, 담배를 금지하는 거다. 유럽 교회에 가면 목사님도 다 한다더라. 성경에도 예수님이랑 제자들이 포도주 마시는 거 다 나와있다. 담배는 성경이 쓰인 이후에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있지도 않은데 왜 금지하는지 모르겠다.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라고 쓰여있으니까 취하기 전까지만 마시면 된다.' 온갖 합리화와 핑계를 대며 친구들과 모든 것을 즐겼다. 난 술과 담배를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항변하려고 교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본 적도 있고, 술을 마시고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 뒷자리에 앉아 본 적도 있었다. 물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했다. 난 그렇게 대범한 성격은 아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실질적인 문제는 교회나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술과 담배를 한다고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해서 신앙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술과 담배가 나의 몸과 정신에 좋지 않다는 것이고, 군 전역 후에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던 나에게는 그다지 도움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도피와 회피를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현실과 부딪쳐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도피나 회피가 아닌 옳은 방향으로의 성장이다.




술을 끊은 지 31일 차가 되었다. 계획했던 100일 금주 기간의 1/3을 지나고 있다. 이번주에는 골프를 쳤다. 동반자들이 그늘집에서 맥주 한잔 하자고 꼬시는데, 끝까지 마시지 않았다. 자기들은 취해서 게임하는데, 나만 안 마시려면 돈을 내라고 농담을 하길래 진짜 인당 1만 원씩 줘버렸다. 그날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도 나에게는 술 마시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금주기간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지난주에 얘기한 것처럼 마라톤 대회 신청도 했다. 2024년 1월 14일 일요일에 대회가 열린다. 내가 이 금주 도전에 대한 글의 연재를 마치는 날이다. 그날 새벽 3 30분, 나는 '호찌민 국제 마라톤'에서 하프(Half, 21Km) 코스를 뛸 계획이다. 이 날짜가 의미 있는 것 같아서 인터넷에서 보자마자 신청 버튼을 눌러버렸다. 마라톤을 뛰고 와서 연재의 마지막 글을 올릴 생각이다. 의미 있고 또 스스로에게 뿌듯할 것 같다. 처음 하는 마라톤 도전이라 10Km로 하는 게 더 낫지는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나중에 거리를 바꿀 수도 있다니까 일단은 하프로 신청해 보았다. 그전까지는 매일 저녁 열심히 운동을 해 보자. 술을 끊고 나서 이렇게 조금씩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주의 연습 기록. 대회 전까지 매주 1Km씩 연습량을 늘려볼 생각이다. 일단 이번주에는 2번 뛰었는데, 그 중 한 번은 9Km까지 뛰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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