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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Dec 03. 2023

반짝이는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

평범한 세계의 말들

적어도 대학교 때까지 내가 알던 세상은 정말이지 진짜 세상의 일부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 알고 있던 세계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구분을 짓자면 '진짜 세상의 데모 버전' 정도였던 것 같다. 거기에선 리얼 월드에서의 적응을 위한 데모 환경 정도밖에 체험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술과 그 주변의 환경만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제 진짜 세상으로 들어온 이상, 그전의 데모 버전에서 마시던 싸구려 레몬 소주와 말라비틀어진 쥐포 안주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 것은 이제 집어치워버리자. 난 반짝이는 진짜 세상으로 들어가련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에 한 코스피 상장회사에 취업했고, 주식과 자금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던 사원이었을 때는 주식, IR을 담당하며 회사의 외부 관계인과 주주들도 관리했었고, 대리 시절에는 자금 관리와 외환 거래를 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서 이제 막 끝나는 미국 시장을 살펴보고 세계 금융시장을 리뷰하며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었다. 대표이사와 같은 임원들 즉, 회사의 높은 분들에게 내가 만든 자료를 매일같이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신 연차가 짧음에도 빈번하게 높은 분들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대표이사에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대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 부서의 이사님과 비서실장님도 대표님 방에 소환되었는데, 이사님의 필사적인 방어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 이런 대쪽 같은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뭐 이런 그럴듯한 임기응변으로 날 살려내신 내공이 대단한 이사님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죄송스럽고 또 미친 짓이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대표님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스트레스가 많았고, 회사의 동료들과 술자리를 많이 가졌던 것 같다.


이날도 퇴근 후에 회사의 친한 동료들과 일식집의 한 방에 모여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있었다. 커다란 접시에는 두툼한 광어회가 시원해 보이는 검푸른 자갈 위에 올려져 있고, 가을에는 꼭 먹어야 한다는 전어도 뼈째회(세꼬시)로 시켜서 작은 접시의 갈대발 위에 올려져 있다. 역시 쌀쌀한 날씨에는 회 한 접시와 시원한 소주가 잘 어울린다. 우리 넷은 회와 소주, 그리고 매운탕까지 먹고 나서 2차는 어디로 갈지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선배가 "오늘은 회사 근처에 있는 그 카페로 가자."라고 하는 것이었다. 술이 어느 정도 올라온 상태라서 2차 때 술 한잔 더 하고 싶었는데, 커피를 마시러 가자하니 조금은 서운했지만 별 수 없이 선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 카페는 회사 근처에 있는데, 종종 커피를 마시러 가던 곳이기도 해서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처럼 생겨서 뭔가 특별한 것을 언급할 만한 것도 없는 곳이었다. 네모난 점포에 테이블이 10개가 안 되는 정도로 있었고, 한쪽 벽에는 카운터 겸 커피 머신이 있는 그런 곳이다. 그냥 카페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곳이다. 우리는 2차의 행선지로 잡힌 그 카페에 들어갔고 늘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 사장님이 우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9시가 훨씬 넘었으니 '늦은 시간까지 카페를 하시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우리 술 마시러 온다고 미리 말씀드렸죠?" 한 선배가 여자 사장님에게 묻자, "그럼, 다 준비해 놨죠."라며 출입문을 닫더니 카페 카운터 옆쪽의 장식물이 진열되어 있는 벽을 한 방향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벽이 드르륵 열리며 새롭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왔다. 이 카페를 여러 번 와 봤지만 이렇게 벽이 열리는 것은 처음 봤다. 놀랍게도 벽 속에는 작은 바(Bar)가 준비되어 있었고, 환하게 불을 켜자 바(Bar)에는 여러 종류의 위스키와 데낄라 같은 술이 진열되어 있었다. 또 카페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여자 직원이 바(Bar)로 자리를 옮겨 술과 술잔을 준비해 주었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사장님과 종업원은 미리 예약했던 선배를 보며 웃고 있다. 그렇게 우린 즐거운 듯 함께 게임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했고, 비싼 술을 마셨다. 직장에 들어온 나는, 이렇게 기존에 내가 알던 세계에 숨겨져 있는 다른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세상이 다가 아니었구나.' 직장에 들어온 이후, 유흥의 세계는 대학교때와는 그 차원이 달라졌다. 항상 알고 있던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이 숨겨진 그 뒤편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신기한 뒤편을 보려면 더 많은, 더 고급스러운 술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선 또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 신기하고 반짝이는 술집들은 고위 공직자나 기업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밀집해 있었으니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곳을 들어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듯 보였다. 나중에 보니 그 동료들과 같이 갔던 카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술을 더 마시고, 돈을 더 많이 쓸수록 우리의 세상에 숨겨져 있던 비밀스러운 장소는 그전보다 더욱 반짝이는 것들을 조금씩 더 보여주었다. 반대로 말하면, 직장인의 저녁 술자리는 이런 식으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홀려서 돈을 빼가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입사 초기에 회사의 또래들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사실 술집에 돈을 바치는 모임이었던 셈이다. 우리들의 대화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술집에 가며 차 안에서 했던 대화나 커피를 마시면서 했던 대화 이상의 진전은 술집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대부분은 '누가 술이 더 센지, 요즘 연예인들은 어떤지, 여자친구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와 같은 얘기들이었다. 장소와 술만 더 고급스러워졌을 뿐 사실 대학교때 하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만 뭔가 화려하고 반짝이는 곳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익숙해진다면 또 본질을 본다면 대학교 때 술 마시는 과정을 더 많은 돈을 내며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해를 돕자면,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유치원에서 더 비싼 유치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직장에 들어오니 이런 또래나 선후배 모임뿐 아니라 부서 회식, 입사 동기 모임, 업계 모임, 거래처 미팅 등 모든 자리의 저녁에는 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모임을 하던지 결국엔 술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술자리에선 모두 형동생이 되고, 친구가 된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돌아가고, 우리만의 비밀을 만들고, 그렇게 끈끈한 동료애가 생겼다... 고 믿기도 했다. 얼마쯤 후에 알고 보니, 내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은 죄다 회사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본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라던 선배가 얘기하고 다닌 것이었다. 배신당한 것 같고, 또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직장에서의 술자리는 재미대신 의무로 참석하게 되었다. 물론 재미있던 모임도 있었다. 정말 친구가 되고, 끈끈해지는 감정이 드는 그런 술자리도 있다. 그런데 윗자리로 올라가며 점점 그런 모임도 없어지게 되는 것 같다. 또 적어도 술이 취한 이후에는 대부분 의미 없는 말들의 향연(아무 말 대잔치)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남을 탓하려는 게 아니라, 나도 그랬다. 아무 말 대잔치의 훌륭한 플레이어로써 현역 활동을 했다.



이번에 술을 끊겠다고 강하게 결심한 계기도 사실 직장 때문이다. 연재의 절반쯤 왔으니, 여기서 얘기를 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난 한국 회사의 해외 주재원 자격으로 외국에서 법인장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업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장을 오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나의 중요한 업무가 된다. 그리고 코로나가 끝난 올 해에는 평소보다 많은 출장자가 방문을 했다. 난 그들과 같이 업무를 하고, 저녁에는 술자리를 함께했다. 출장자들은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인 외국에 오면, 또다시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느끼기에 대부분의 출장자들은 외국에서의 술자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나도 그랬다. 오랜만에 반짝이는 비밀의 문이 한번 더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이해가 된다.


계속해서 출장자가 밀려들던 이번 가을, 난 출장자들과 술자리가 없던 중간중간의 날에도 현지 거래처와 미팅을 가져야만 했다. 그렇게 빈틈없이 미팅과 술자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글의 연재를 시작하기 전 한 달 동안 대부분 술을 마신 것 같다.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한 출장자가 조언을 해주었다. '본인 건강은 본인이 챙겨야 된다.'라고. 늘 듣던 말이었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이 문장이 내 마음에 받아들여졌다. 보통의 경우, 내 주위의 조언들은 대부분 나에게 들어오지 못하고 튕겨져 버리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쿵.'


그 충고를 듣고 나서 얼마 뒤 내가 집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병원에 누워 영양 주사를 맞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진짜 변해보자. 이번에는 정말 나를 먼저 챙겨보자.' 그리고 출장자가 나에게 해주었던 조언이 생각났다. '본인 건강은 본인이 챙겨야 된다.' 이 간단한 말이 이번에는 꽤 깊게 들어왔다. 어쩌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은 이미 내 주변에 널려있고 또 내가 알고 있기도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상태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싶을 때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주변의 말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러자 비밀스럽게 반짝이는 조언을 구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도움이 되는 조언들은 이미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밀스럽고 반짝이는 세계 또한 환상일 뿐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곳도 이미 내 곁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100일 금주를 도전하게 되었다. 마음을 먹자마자 가족과 회사에 알렸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만날 때마다 얘기해 뒀다. 이전에 담배를 끊을 때도 이런 식으로 해서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남들도 이런 식의 전략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렇게 다 알려놓게 되면 창피해서라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걸 알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 브런치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글도 사실은 금주를 위해 내가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 글은 나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금주한 지 이제 38일째가 되었다. 거의 금주 약속 기간의 40%를 채워간다. 요즘은 술 대신 운동과 글쓰기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다. 운동과 글쓰기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일상에 집중하게 한다. 반짝이지 않는 이 밋밋한 것들에서 나를 찾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연말이 다가온다. 12월에는 연말 모임이 많기 때문에 일찍 송년 모임을 끝내는 경우도 있다. 현재 내가 회장으로 있는 업계의 한 모임은 지난주에 벌써 송년회를 끝냈다. 다들 올해는 베트남의 경기가 좋지 않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 이 자리는 내가 모임의 회장직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자리였기도 했다. 난 앞자리에 나가 소감을 얘기하고, 건배사를 했다. 끝까지 탄산수를 따라 놓고 모든 행사를 진행했다.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빈 컵에 술을 따르고 간 사람이 나오자 옆자리에 앉은 분이 대신 마셔주기도 했다.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는 걱정하기도 했었다.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셔야 될 수도 있겠다.'라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저 내 걱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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