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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Dec 10. 2023

담배 끊으러 수영장에 갑니다

경기를 끝내는 방법

'자! 접배평자 세 바퀴 돌고 올게요.'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겠는가? 만약 알고 있다면, 분명히 수영장과 친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결혼 전, 나는 회사가 끝나면 빠지지 않고 수영장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암호 같은 소리를 매일같이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배가 고파도 어쩔 수 없다. 이걸 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상한 말인 것 같지만, 나에게 수영은 담배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에 난 담배를 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청나다는 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회사에 담배를 끊겠다고 공언을 하고, 병원에는 담배 끊는 약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으며, 없는 용돈을 아껴 금연 관련된 책을 사서 읽고 하는 등의 노력을 했었다. 그리고 수영도 이 노력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연은 실패를 계속하는 중이다. 매일같이 회사 구석에서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며 또다시 다짐하곤 했다. '이것만 피우고 이제 그만 끊어보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다. 이번엔 퇴근하며 회사의 지하주차장에서 또 한 번 다짐을 한다.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이 담배 한 대만 딱 피우고 끝내보자.' 이렇게 늘 마지막인 담배를 피우며 나는 수영장으로 출발하곤 했다.


회사가 끝나면 근처의 수영장에 들렀다. 회사 지하주차장에서부터 수영장이 있는 건물의 1층 주차장까지는 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됐으니까, 거리나 시간은 딱 적당한 곳이었다. 그렇게 금방 수영장의 주차장에 도착하면 한 번 더 마음이 흔들리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한 대만 더 피우고 갈까?', '아니다. 그냥 내려가자.' 애써 다짐을 지켜내고선, 차에서 내려 건물 입구로 들어간다. 수영장이 있는 지하로 가는 계단을 절반쯤 걸어서 내려가다 보면 수영장의 익숙한 물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계단이 끝나는 곳 정면 벽에는 파랗고 커다랗게 수영하고 있는 사람이 아이콘 형태로 그려져 있고, 계단 끝의 난간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아이보리 색의 철문이 보인다. 이제 그 철문을 힘주어 밀어내면 된다. 그러면 머리가 채 다 마르지 않은, 수영 가방을 들고 서있는 동네 아주머니들 그리고 학생들이 서너 명 정도 카운터 앞의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 카운터 직원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에 회원권을 보여주고 락커키를 받아 수영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입장 루틴을 마무리했다. 이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수영장이 있는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면 그냥 자동으로 수영장 안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셈이었다. 그만큼 반사적으로 움직였고, 그렇게 오랫동안 수영장에 다녔다.


락커룸에 들어가면, 우선 낮 동안에 일하면서 담배 냄새에 절어 있는 셔츠와 바지를 벗어 툴툴 털어내고 검은색 사각 수영복을 챙긴다. 그래도 명색이 수영 레슨을 받는 것이니까 몸에 딱 달라붙는 선수들이 입는 수영복이다.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정도 길이의 아레나 또는 스피도 수영복을 주로 입었는데, 거의 검은색의 무난한 것을 입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비슷하긴 했는데, 정말 가끔은 휴양지에 갈 때 입는 반바지 같은 야자수가 그려지고 헐렁헐렁한 옷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긴 했다. 물론 이제 막 수영 레슨을 등록한 초급반 사람이 그러긴 하는데, 첫째 날만 잘 모르고 가져오는 것이고, 둘째 날부터는 다른 사람들 입는 것을 보고 눈치껏 바꿔 온다. 같은 케이스로 여자들의 경우에는 비키니를 입고 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데, 본인이 당황해 그냥 나가 버리는 경우도 보았다. 뭐 듣기로는 샤워실에서 샤워만 하고서 깜빡하고(옷을 입은 줄 알고) 그냥 맨 몸으로 자연스럽게 수영장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던데, 난 그런 정도는 본 적이 없다. 이제 샤워장에서 간단히 물도 한번 뿌리고 수영복도 잘 갖춰 입었으니, 본격적인 레슨을 받으러 수영장으로 나갈 차례다.


샤워장에서 나와 수영장을 바라보면 기분이 좋다. 강사들이 구령을 외치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동굴에서처럼 벽에 부딪쳐 내 귀로 다시 되돌아오는 소리도 좋다. 돌고래가 초음파를 쐈다가 되돌려 받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하다. 바닥에는 파란 타일 색깔을 머금은 가득 채워진 수영장 물이 소독약 냄새를 담아 출렁이고 있고, 항상 같은 노래긴 하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바꿔서 틀어주는 것 같은 경쾌한 노랫소리도 심장을 뛰게 한다. 이제 나의 레인으로 들어가자. 이 수영장에는 총 여섯 개의 레인이 있는데 난 샤워장으로부터 다섯 번째 떨어져 있는 레인, 그러니까 샤워장으로부터 제일 먼 곳에서 두 번째 레인으로 가야 한다. 안쪽 첫 번째는 초급반이 음파음파 하는 레인이고, 제일 바깥쪽 여섯 번째는 마스터즈 형님들이 노는 레인이다. 이 레인에선 강사가 따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강사와 같이 수영하며 노는 곳인데, 처음 보면 누가 강사고 누가 수강생인지 알 수도 없다. 지난달에 강사가 나에게 마스터즈 반으로 옮기라고 했는데, 가지 않았다. 저기에 가면 무슨 선수가 된 것처럼 물과 싸워야 한다. 난 계속 여기 5번 레인에 붙박이가 될 셈이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5번 레인의 키가 작은 여자 강사는 옆 레인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 강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수영모에 물을 가득 담아 풍선처럼 만들었다가 본인 머리에 쓰는 장난을 치며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일단 가볍게 접배평자 세 바퀴 돌고 와서 오늘 수업을 진행하자고 외치며 호루라기를 삑 하고 불고선 샤워장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벽과 물에 부딪친 호루라기 소리가 칼칼하게 내리꽃히며 한 번, 그리고 옆으로 퍼지며 또 한 번 들려왔다.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을 줄여서 접배평자라고 한다. 자유영이 아니라 자유형이라는 것에 유의하자. 내가 틀리게 쓴 것이 아니다. 원래 자유형은 자유롭게 아무 영법이나 하면 되는 것인데, 틀에 맞춰진 자유형의 수영법이 따로 생겼다. 자유가 없는 자유형인가? 싶기도 하다. 자유롭게 하라고 했더니 모두 똑같은 영법을 하고 있다. 사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형의 수영법이 제일 빨라서 자유롭게 아무거나 선택하라고 했는데도 모두가 이 영법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또 굳이 자유가 없는 자유형이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 방식보다 더 빠른 영법이 나오면 금세 또 바뀌어 버릴 예정인 수영법인 셈이다. "휴. 헉헉." 연습 중반이 넘어서부터는 숨이 찬다. 담배를 피워서 그런가? 이 놈의 담배를 빨리 끊어야지 싶다. 또 물안경이 싸구려라 그런가 앞도 잘 보이지 않고, 팔다리는 느려지는데, 앞사람은 엄청 빨리도 간다. 심지어 배도 고프다. 수영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처음 접영으로 시작하여 출발한 이상 자유형을 끝으로 마지막 세 바퀴까지 어떻게든 들어오게는 되어있다.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엔 끝까지 해내는 나를 보며 뿌듯함을 느껴보기도 한다. 시작하면 결국엔 끝나기 마련이다.


여자친구한테는 담배를 끊었다고 했는데 사실은 끊지를 못해서, 낮에 일하며 피운 담배 냄새를 지우고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 수영이었다. 언젠가는 수영을 배워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역시 내가 똑똑한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소독약이 풀어진 수영장에서 한참 동안 수영하며 몸을 불리다 보면 담배 냄새는 사라져 버리고, 또 샤워한 다음에 불가리 향수를 뿌리고 나서 여자친구를 만나면 정말 단정하고 모범적인 남자친구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며 그 사이에 담배를 끊어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초급이던 내 실력은 5번 레인에서 수업을 받는 수준까지 성장해 버렸다. 게다가 까딱하면 마스터즈 반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미쳤다.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수영을 한 건지 모르겠다. 담배를 끊어야 나갈 수 있는데 끊어지지는 않고, 무한 수영장 지옥에 갇혀버릴 것 같다.


중독은 거짓말을 부르기도 한다. 담배를 피우고 안 피웠다고 얘기해야 하고, 혼자 술을 마셔 놓고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뻔뻔함을 불러낸다. 그나마 잘못되었고, 부끄럽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가?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담배를 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고, 결국엔 곧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는 끊었다고 얘기하고 수영장에 다니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내가 금연 경기에 참가 중이라고 생각해 본다. 시간제한은 없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 점처럼 보이는 결승선은 있는 경기. 종목은 자유형. 초보인 나는 바로 음파음파부터 시작해 도전해 보기로 한다. 하지만 실패. 이렇게는 도저히 끝까지 갈 수가 없다. 다음은 멋있게 접영으로 해보자니 힘이 금세 빠져버려 도저히 더 나아갈 수가 없다. 배영으로 느리게 가려고도 해 보았으나 결승선이 너무 멀어 중간에 포기하게 됐고, 평영으로 가다가 다리 관절이 나가버렸다. 그래, 나는 벌써 여러 번 이 금연 경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나에게 맞는 영법을 찾지 못한 것일 뿐이다. 체력을 기르고 나에게 맞는 영법을 찾아 또다시 도전하면 된다. 비록 아직까지는 계속 실패하고 있지만 나는 담배 끊기 대회에서 중간에 일어나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아직 경기에서 패배하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난 계속하여 다시 도전할 것이니까. 적당한 방법을 찾기 위해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 실패가 완료된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주 45일 차. 계속하여 실패하던 금연에 성공했을 때와 같이 아직은 잘 참고 있다. 나에게 적절한 영법을 찾은 것을 수도 있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과거 금연을 시도했을 때와 지금 금주에 도전할 때 모두 운동을 하고 있다. 금연했던 때는 수영을 했고, 지금은 달리기를 하며 금주에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운동은 나를 변화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하고, 무언가 실천하고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가는 나를 보며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다.


1월에 있을 마라톤 연습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 10Km 이상의 달리기는 일주일에 2회 연습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날에는 간단한 조깅과 같은 몸풀기 운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지난주에는 쉬지 않고 15Km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21Km 하프 마라톤 코스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키워가는 중이다. 이제 관심사는 금주가 아니라 달리기에 더 집중되고 있는 기분이다.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기를 하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랄까? 술 마시는 것보다 이것이 더 재밌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물론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달리기 하러 나가는 것이 귀찮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을 잡고 얼마 전 새로 산 러닝화를 신으면, 자동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처음부터 달리지 않아도 된다. 일단 러닝화 먼저 신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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