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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Dec 24. 2023

금연 도시의 시민으로 살기

뭉치면 힘이 나요

글을 쓰기 위해 한 도서관에 앉아있다. 얼마 전 이 연재글의 "교회에 가면 술담배 끊어지나요?"편에 등장했던 그 도서관이다. 출장차 며칠 전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마치고, 주말 기간은 대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근처의 카페에 가서 오늘의 연재글을 쓰려다가 근 10년 만에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이 도서관을 처음 방문했던 것은 중학생일 때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도서관이기도 하고, 집과도 멀지 않은 곳이라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접근성 좋은 곳이었다. 당시에는 입장할 때 100원씩 내고 열람증을 받아서 들어올 수 있던 곳이었는데, 나중에는 무료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하 매점에 가면 도대체 어떻게 끓이는지 그 비법이 궁금할 정도로 신기하게 맛이 없는 라면을 싼 값에 먹을 수도 있었고, 토요일에는 무료로 영화 상영도 해주던 고마운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 시절에도 이 도서관을 자주 찾곤 했다. 집이 근처였기 때문에 대학교 방학 때마다 여기에 와서 공부를 했고, 또는 책을 읽으러 오기도 했던 곳이다.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왔을 때도 할 일이 없는 낮에는 여기에 와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친구들한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오늘은 해외에서 귀국해서도 앉아있는 중이다. 그만큼 이곳에는 내 추억이 곳곳에 남아있다. 담장마다, 계단마다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후드득 떨어지는 그런 곳이다. 저 휴게실에 앉아 영어로만 얘기해 보자고 말한 뒤에 별 말이 없었던 중학교 때 친구가 보이고, 이 계단을 오르며 음료수를 흘렸던 나의 흔적이 보인다. 초등학교 이후 고등학교 때 우연히 처음 만난 여자 친구들이 너무 예쁘게 변해있어서 수줍게 인사했던 붉은 담벼락과, 공무원 준비를 한다며 한숨 쉬던 친구와 취업 얘기를 나누던 화장실. 모두 다시 그려볼 수 있다. 처음엔 이곳을 '충남도서관'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대전학생교육문화원'이라는 기다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냥 '도서관'이라 부른다.


이 도서관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여고가 있다. 체크무늬 교복이 예쁜 학교인데, 여고 교문이 있는 쪽의 운동장과 이 도서관 진입로가 붙어있어서 도서관으로 들어오려면 그 길을 지나야 한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평소와 다름없이 그 교문 앞을 지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잔뜩 몰려있는 길을 남자 고등학생 혼자 걸어가는 것이 부담이 되는 시절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이 길을 멀리 돌아서 들어가면 내가 지는 느낌이기 때문에 땅바닥을 보며 꿋꿋이 혼자 내 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여고 정문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고 담장 안쪽의 여학생 무리들이 "OOO 어디 가냐? OOO 엄청 못생겼네. 야! 이리 와봐!"와 같은 큰소리를 냈고, 난 얼굴이 빨개진 채로 냅다 뛰어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내가 입고 있던 교복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명찰을 떼지 않은 것이었다. 난 명찰을 떼며 속으로 그 여학생들 욕을 엄청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한동안은 그 여고 정문을 돌아서 다녀야 했다. 여고의 교문이 나오기 전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고 교문을 지난 뒤에 나오는 육교를 다시 건너서 디귿자 형태로 돌아 도서관에 출입했던 것이다.


당시엔 그 여고생 무리들에게 내가 졌다. 5~6명 정도 되는 애들이었는데, 아무리 조그만 여자애들이라고 해도 뭉쳐있으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걔들도 함께 있으니까 나에게 소리를 질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집단은 개인보다 힘이 세다. 그저 개인이 모인 것에 불과한 집단은 힘을 만든다. 그렇기에 집단은 '1+1=2'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개인이 집단에 속하게 되면, 개인들은 그 집단의 힘을 이용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기 위해 집단의 룰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만족감을 높이려 하고, 회사와 같은 곳에서 조직원 각 개인들에게 만족스러운 소속감을 주려고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구성원들이 소속된 집단에 만족하게 될수록, 집단이 정한 룰을 스스로 따를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성원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그 조직의 룰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조직 인사관리의 중요한 관리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금연도시 사이트 갈무리


나는 과거에 담배를 끊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인터넷 커뮤니티인 '금연도시'의 시민이 되기로 결심했다. 42,147명이나 되는 시민이 있는 저 도시에서 나는 37명밖에 없는 신의 계급이다. 이 도시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고, 0.09% 이내에 드는 최상위 계층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입한 지 15년이나 된 이 카페에서 비록 현재 아무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탈퇴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글을 3개나 쓰고, 댓글도 35개나 달았다. 무엇보다 이 금연도시의 시민답게 15년 이상 금연 중이다. 내가 탈퇴하면 신 계급의 인원이 줄어들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회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계속 남아있기도 하다. 조금 웃기긴 하는데, 약간의 의무감이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금연과 같은 중독을 벗어나는 일은 혼자 힘으로 어려운 것이다. 나는 금연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했던 일이 이 금연도시라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추천해 준 책도 읽고, 금연 후 신체 변화 같은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들어왔지만 나중에는 나의 의지를 확인하고자 들어오게 되었다. 그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금연을 실천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커뮤니티의 가장 하층 레벨인 천민 단계부터 시작해서 평민으로 넘어가기만 수십 번 했었고(고작 하루를 못 버텼다는 말이다.), 기사 단계에서 다시 천민으로 내려온 경우도 다시 수십 번이었지만, 이 모임의 제대로 된 조직원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소속감은 의지를 더욱 강화시켜 준다. 이 강화된 의지로 인해 실천할 수 있는 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 하는 무리를 찾아보면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성과를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난 최근 들어 금주 관련된 책을 읽고 남들이 써 놓은 글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과거 금연할 때처럼 금주와 관련한 어느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했다. 모두 아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저 그런 자료나 사람을 옆에 가까이 두기만 해도 나와 같은 무리를 찾은 느낌으로 힘을 얻을 수 있고, 한번 더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도 그런 의미로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내가 쓰면서도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질 수 있고, 남들에게도 그저 금주와 관련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금주 59일 차. 금주 기간 중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매년 연말에는 본사에서 사업 보고를 하고, 내년도 목표를 계획하는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본사에서 회의를 마치고 송년 모임을 했는데, 정말 과거와는 다르게 회식하는 분위기가 꽤 변한 듯하다. 대표나 높은 임원들이 술을 마셔도 밑에 있는 직원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그 분위기대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꼰대 발언을 하자면, 과거에 비하면 술 끊기 정말 좋은 환경이 아닌가 싶다.


출장 목적이 늘 같아서 매년 같은 시기인 연말에 출장을 온다. 올해는 하필 가장 추운 시기에 한국에 들어왔다. 베트남에서만 7년째 살고 있다 보니 이런 추위가 어색하다. 처음 들어오던 날부터 눈이 내리고, 바람이 세서 어디 나가질 못했다. 그러다 베트남으로 복귀하는 크리스마스부터는 날이 풀린다는데, 강추위만 경험하다가 들어가게 생겼다. 그래도 하루 이틀 만에 몸이 적응되어 이제 동네 산책도 하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굴, 새조개, 방어회 이런 게 생각나는데, 이런 음식과 꼭 붙어서 생각나는 것이 소주다. 예전에도 그랬다.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또 술 한잔 들어가고 나면 꼭 생각나는 것이 담배였다. 그런데 끊고 나니 이제 아무런 생각이 없다. 역시 몸은 금방 적응한다.


그나저나 도서관에 앉아 창밖으로 아무도 없는 여고의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니 썰렁한 기분이 든다. 저 자리는 육상부 애들이 뛰어다니던 곳인데, 겨울이라 아무도 없나 보다. 예전 여고생들로 가득 차 왁자지껄하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시에 내가 여고 정문 앞을 걸어갈 때 내 이름 부르며 놀리던 애들도 생각났다. 그때 내가 속으로 욕을 많이 해서 무슨 저주에 걸리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오늘로써 확실히 용서해 주겠으니 이제 당시의 우리 또래가 되었을 자녀들과 재밌게 지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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