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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an 07. 2024

정신력으론 술을 못 이깁니다

정신 차리세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나는 동네에 있는 유도 도장에 다니고 있었다. 나와 같은 꼬맹이들이 다니는 곳이라서 거의 놀이방 수준의 유도였을 것이다. 낙법을 배우고 대련을 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딱딱한 흰 매트 위에서 친구들과 굴러다니던 기억밖에는 없다. 관장님만 없으면 우리는 늘 레슬링을 하고 놀았다. 그러다가 종종 관장님한테 혼나긴 했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당시에 유행하던 WWF의 프로레슬링을 따라서 매트 위를 뛰어다니곤 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고 했다.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면 어떤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손으로 허리의 검은띠에 엄지를 걸친 채 관장님이 이 말의 뜻을 설명했다. 관장님은 두툼한 흰색 유도복에 검은색 띠를 매고 일어서서 우리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유도복 가슴에 있는 태극기가 왠지 관장님을 더 믿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해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우리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두꺼운 하얀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장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 강의가 있기 전, 그러니까 유도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들은 각자 좋아하는 프로레슬링 선수들의 필살기를 선보이며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관장님께 꾸지람을 듣고 나서는 갑자기 초집중하여 이 어려운 한문으로 된 말씀을 듣고 있는 중이다. 조금 전, 관장님이 우리에게 초능력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용히 본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관장님은, 어느 일본인 스승에게 배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겠다며 검고 동그란 점이 찍힌 종이를 한 장씩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붓으로 동그란 점을 찍은 것 같았는데, 하얗고 얇은 화선지에 50원짜리만 한 검은색 점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다. 이제 이 종이를 자기 눈높이에 맞춰 벽에 붙인 다음에, 불이 붙는 것을 생각하면서 똑바로 바라보면 된다고 그런다. 정신세계에서 집중된 에너지가 물질세계로 옮겨져 불이 붙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했다. 순수한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잡생각을 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사람은 종이에서 불이 붙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말을 정말로 믿었다. 당시에는 소림사가 나오는 무협 영화도 많이 있었고, 유리 겔라(Uri Geller) 같은 초능력자들도 살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관장님의 얘기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정말 어떤 귀한 비법을 전수받은 것처럼 우리는 심각하게 집중하여 그 점을 몇십 분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내 머릿속의 정신 에너지가 기다랗게 저 점에 연결되어 활활 불태워지는 것을 상상하며 앉아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점에서도 불이 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정신 에너지를 집중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누구의 점에서도 변화가 없었다. 관장님은 이제 낙법 수업을 하자면서 종이를 걷어가려 했고, 우리 친구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면서 관장님께 부탁하기도 했다. 심지어 나는 집에 가서도 종이에 점을 찍어놓고 다시 정신을 모아 보기도 했었다. 


이 날, 수업이 끝날 때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관장님은 끝까지, 그리고 내가 유도 학원을 그만둘 때까지도 시범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말이 있다. '술은 정신력으로 마셔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초중고등학교 때의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정신력으로 술을 마시고 상대보다 오래 버티면서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신력이 강해서 미국애들을 상대할 때 술로 이겨버린다는 이상한 얘기에도 괜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나도 멋있는 드링커(drinker)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에는 선생님들이 단체로 어디서 그런 강의를 듣고 오는 것인지, 여러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그 후에 대학생이 되었더니, 이번에는 우리 아버지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절대 취하지 말고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많이 마시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난 정신력이 약한가 보다. 나는 술에 자주 패배하는 종잇장 같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봐, 술은 말이야 정신력으로 마시는 거야. 절대 취하지 않겠다고 정신을 딱 차리면 된다고. 난 절대 상대방이 취하고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정신을 놓지 않아. 그렇게 마셔야 돼." 직장에 들어오니 회사의 한 상사가 나에게 또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이뿐 아니라 누군가가 술자리에서 취한 모습을 보이면, "저 친구는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먹으면, 저렇게 실수하지 않는다고."라는 말을 해주기도 했다. '맞는 말일까?'라고 반쯤은 믿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너무 여러 번 듣다 보니 맞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력으로 술을 이겨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린 시절에 나와 친구들을 속이던 유도 학원의 관장님 일화가 생각난다. 정신력으로 술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은 정신력으로 종이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술은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지나면 취하는 것이지,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정신에 있는 에너지가 나의 간과 혈관과 모든 장기들에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가능한 일 일 텐데, 그럴 리가 없다. 이제 술을 오랜 기간 동안 마셔보니 확실히 알 수 있다. 술은 정신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술을 마실까 말까를 맨 정신으로는 판단할 수 있어도, 이미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그 양을 내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의 주량을 알고 그전에 멈출 수 있는 자제력이 필요한데, 사실 술을 여러 번 마시다 보면 항상 그 자제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인간인 것 같다.


우리는 정신력으로 내 몸과 관련된 많은 것을 통제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패하면 정신력이 부족한 나를 탓하기도 한다. 종이에 불을 붙이지 못한 나의 정신 상태를 탓할 수 없듯이, 술에 취한 것을 가지고 나의 부족한 정신력을 탓할 수는 없다. 술을 마시고도 정신력으로 취하지 않을 수 있다면, 독약을 먹어도 정신력으로  수 있다는 말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력을 탓하며 나를 패배자로 만들지 말자. 자주 취하거나 몸이 상하는 것 같으면, 술을 줄여야 하는 것이고, 그래도 어려우면 아예 끊어보는 것이 방법이다. 술에 뭔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해서 반드시 마셔야 한다거나 마실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애버리는 것으로 하자.




금주 73일 차. 오늘을 다른 숫자로 설명하면, 하프 마라톤 대회까지 D-7일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의 또 다른 계획이 착실히 준비되고 있는 날이다. 이 연재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마라톤을 생각하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3km 달리는 것부터 5km, 10km, 그리고 이제 15km, 16km까지 계속하여 그 연습량을 늘리고 있다. 이 연습량을 늘리면서는 뿌듯한 생각이 든다. 몸이 점차 달리기에 적응되고 있어서, 이제는 다음 주에 있을 하프 마라톤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제 달리기 연습을 하면서 오늘 쓸 글에 대한 주제를 생각할 수 있었고, 오늘 글을 쓰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라톤을 정신력으로 하면 완주가 가능할까?', '체력적인 노력이나 도움 없이 저질체력인데 정신력만 충만하다고 해서 마라톤을 할 수는 있을까?' 만약 어쩌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할 것이다. 운동을 할 때는 그에 맞는 기본 체력을 만들고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이 연습과정이 없이 완성된 상태를 보여줄 수는 없다. 금주하는 것도, 금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속하여 실패하겠지만, 성공할 수 있는 상태로 나를 만들어 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자. 운동으로 따지면 체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패'를 다른 말로 하면 '연습'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도 있겠다. 그러니 금주와 금연을 하기로 결심했다면 그에 맞는 상태가 될 때까지는 계속하여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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