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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an 14. 2024

술을 끊는 알고리즘

비워진 자리를 채우는 것

100일간의 금주를 결심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헬스장에 가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곤 했지만, 곧 걷기와 달리기를 주된 종목으로 정하고 열심히 트레드밀 위를 걷고 또 달리기 시작한다. 사실 헬스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트레드밀에서 운동을 한다. 그렇게 나도 누군가의 옆에 올라서서 우선 30분 정도를 걸어보기로 한다. 페이스는 Km당 10분으로 세팅하고 30분을 걸으면 3Km가 되겠거니 하며 걷고 있는데, 같이 걷고 있던 옆자리의 아저씨가 갑자기 속도를 높이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40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사람인데 달리기 전용일 것 같은 기능성의 짧은 바지와 민소매의 싱글렛을 입고 달리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본다. 그저 두툼한 면으로 된 회색 반바지에 역시나 검은색 면티 하나를 입고서 걷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내 왼쪽 뺨에 꽂히는 그의 눈길을 의식한다. 어깨에 근육이 딱딱 박혀있는 그는 나와 많은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아마도 내 옆에 있는 전신거울을 보려고 한 것 같은데, 나도 은근히 신경을 쓰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Km당 6분으로 속도를 올려본다.


"아! 잘 달리고 왔다. 다리에 알 배기는 거 아닌가 몰라. 옆자리 아저씨가 같이 뛰다가 자기가 졌다고 얘기하고는 내려가더라." 집으로 들어오며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뻥치시네." 역시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의 진위를 간파하고 있다. "진짜야. 내가 엄청 오랫동안 달리니까 헬스장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구경하더라고." 나의 엉터리 부연 설명에 이제 아내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헬스장 사람들이 다 모여서 손뼉 치고 난리가 났었는데, 못 보여줘서 아쉽구먼.", "밥이나 먹어." 나는 밥이나 먹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냥 걷기와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달리기에 대해 검색하고 그다음에는 마라톤으로 관심이 이동했다. 유튜브와 책이 인도해 준 결과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작은 금주였다. 지난해, 피곤과 술로 인해 몸에 문제가 발생한 뒤에 100일간 금주를 하기로 결심하고 유튜브에서 관련된 동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시작해 점차 강화된 동영상 추천 알고리즘은 나를 금주에서 운동으로 또 달리기와 마라톤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저 프로그래머들이 유튜브의 이용시간을 늘리기 위해 만들었을 수식의 연산작용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하프 마라톤 참가를 목표로 잡고 대회까지 신청한 다음에는 마라톤을 위한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의 페이스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오버페이스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이젠 트레드밀의 옆자리에서 누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체력을 키운 후에는 헬스장 밖으로 나왔다. 우선 우리 아파트 단지의 공원을 천천히 달려본다. 한 바퀴를 돌면 250미터. 나는 12바퀴를 돌기로 하고 같은 속도로 천천히 달린다. 퇴근 후 아파트의 공원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 있게 3Km를 달린 뒤, 우리 아파트 근처의 다른 아파트 단지까지 이동한다. 이 거리는 1.5Km니까 왕복하면 3Km를 더 달릴 수 있다. 이제 우리 아파트의 정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호수공원까지 달리고 돌아오면 총 10Km를 뛸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달리기를 연습하며 내 주변의 거리가 얼마인지를 계산하고, 나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페이스를 지키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저녁시간에는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 저마다의 페이스를 지키며 달리고 있다. 곧 쓰러질 것 같이 빠르게 달리는 사람, 걷는 게 더 빠를 것 같이 달리는 사람 등 우리 동네의 길 위에는 다양한 페이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초보 러너이기 때문에 너무 빠르게 뛰면, 금방 지칠 것을 알고 있다. 이제는 나를 추월하는 다른 러너에게 기분 좋게 자리를 양보하기로 한다. 조금 더 마라토너에 가깝도록 전문적인 복장을 장착한 나는 퇴근 후에 바람이 많은 동네의 호수 공원 주변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다. 호수 공원에서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가벼운 모자가 기분 좋게 흔들리면, 고글을 벗어 땀을 한번 닦은 후에 나를 추월하는 러너의 옆모습을 힐끔 바라보는 여유도 생긴 것이다. 나의 속도를 알고 있기에, 또 나의 목표를 알고 있기에 끝까지 나의 페이스를 지킨다. 다른 러너와 속도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모든 러너들은 달리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도 오늘의 연습을 마치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온다.



술을 끊고 나서 그 시간을 글쓰기와 운동이 채우게 되었다. 일주일에 2~3번 정도는 술을 마셨고, 한번 마시면 보통 3시간 정도는 소요되곤 했으니까, 일주일에 6시간에서 9시간이라는 꽤 많은 시간을 술과 보내고 있던 셈이다. 또 다음날 몸이 피곤해지기 때문에 사실은 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술 때문에 흘려보낸 것이 된다. 그러니까 술을 끊게 되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 보다 거의 일주일에 반나절, 근무시간으론 하루 이상을 더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나오기도 한다. 이 시간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나면, 나의 삶에 묵직하고 제대로 된 변화를 줄 수 있다.


하나의 결단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번 술을 끊는 도전은 나에게 달리기와 글쓰기를 안내해 주었다. '나에게 나쁜 것을 끊는 도전'이라 생각하며 시작한 금주였지만, '술이 비워진 자리에 무엇을 채워 넣을까?'를 고민하는 도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엔 피곤함과 술로 힘들진 이 그 원인이 되어 삶에 좋은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아닌가 싶다.




금주 80일 차. 금연 5,443일 차. 그리고 하프 마라톤의 D-day. 나에게 오늘을 나타내는 여러 다른 지표들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여러 시계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숫자란 차갑고 냉정한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들은 왠지 차갑지 않은 숫자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전에는 관심도 없던 우리 아파트 단지의 공원 둘레가 몇 미터인지? 나의 분당 심장 박동 횟수가 몇 번인지? 그리고 나의 페이스는 얼마고 또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수록 그 숫자를 더욱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관심을 가질수록 내 주변의 숫자는 온기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전까지는 그저 숫자였던 그 무의미가 따뜻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으로 유튜브의 알고리즘도 따뜻한 연산을 하여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계속 끊을 생각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이번 금주 도전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말이다. 아직 나도 모르겠다. 30분만 걸으려 생각하고 트레드밀 위에 올라가더라도 옆자리에 누가 서있는지에 따라서, 또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나의 행동은 바뀌게 된다. 원래 계획대로 30분만 걸을 수도 있고, 3Km가 될 때까지 뛸 수도 있는 것이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다 멈출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트레드밀 위에 올라섰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대망의 하프 마라톤 D-day. 오늘 새벽에 호찌민 국제 마라톤에 참가했다. 베트남 시간으로 새벽 3시 30분에 달리기 시작했으니까 정말 깜깜한 하늘 아래서 달린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고, 첫 참가에 들뜬 나는 흥분하여 중간에 페이스를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나의 속도를 지켜내려 노력했고, 결국에 완주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본인 묘비의 이름 밑에 적어달라며 그의 책에 이런 글을 썼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나도 그랬다.

오늘 받은 하프마라톤 완주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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