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돌 Nov 05. 2023

유행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꾼다

대학생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어느 초여름의 평일 늦은 오후, 학교 동아리에서 알게 된 동기들과의 약속을 위해 시내 커피숍으로 향했다. 중앙 동아리에서 만난 나와 같은 96학번 신입생이자 다른 학과 학생들이었는데, 동아리 모임에서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며 어울리다 보니 말도 잘 통하고, 성격도 맞아서 이번 여름 방학에 처음으로 가는 동아리 MT때 어떻게 할지를 만나서 얘기하고 함께 저녁도 먹기로 했다. 나, 그리고 다른 친구 3명으로 총 4명이 만날 예정인데, 커피숍에는 일찌감치 한 명의 여자 친구(당시엔 이런 단어가 없었지만 여사친이 정확한 용어)가 먼저 도착해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엔 거의 모든 약속의 첫 만남은 커피숍에서 잡았다. 거리의 골목마다, 건물의 각 층마다 커피숍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토루 커피 같은 체인점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각각의 개성과 분위기가 다른 개인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지금 이 친구가 앉아있는 커피숍은 무슨 로마시대로 들어온 것 같이 인테리어가 되어 있다. 커피숍의 유리문을 잡아당겨 내 몸이 들어갈 만큼의 각도로 문을 열자, 딸그랑 종소리가 들리고 문틈을 통해 옅은 커피 향과 담배 냄새가 같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매장의 분위기처럼 다소 다운된 분위기의 락발라드가 흐르고 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아마, 사랑 때문에 천년을 기다리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하고, 불치병으로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등의 그런 노래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평범한 일반인들의 소소한 사랑은 사랑으로 쳐주지도 않던 때였다. 어떻게든 감정의 극단을 건드려야만 했던 것 같다. 이런 장르에는 '뱅크', '조장혁', '서지원' 같은 가수가 유행이었으니 이 날 오후의 커피숍에도 이런 가수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았나 싶다.


녹색과 붉은색 계열의 줄무늬와 유럽 귀족의 가문 문장 같은 것이 중간중간 새겨진 넓은 소파에 내 친구가 몸을 푹 집어넣은 채 창밖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난 그 친구의 뒤편에서 맞은편으로 돌아들어가 앉아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꽤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야, 뭐야? 너 담배 피워?" 여사친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갈색의 담배 필터를 보며 물었다. 그녀 앞의 테이블에는 오늘의 커밍아웃을 위해 보란 듯이 일부러 꺼내 놓은 것처럼 붉은색 말보로 담뱃갑과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하하하. 야, 일단 앉아봐. 내가 이거 배운 지 이제 막 며칠 됐거든, 나도 아직 어색하긴 해. 근데 이거 이렇게 피우는 게 맞아?"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아직 목구멍으로 연기를 들이마시지 못하고 뻐끔뻐끔 겉담배만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재떨이에 재를 떠는 모습은 꽤 프로같이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70 정도 되는 큰 키에 당시 유행하던 닉스 청바지와 가벼운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날씬한 여자애가 담배를 피우고 재를 떠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긴 했다. 난 여사친 앞의 테이블에 놓여있는 재떨이에 휴지를 한 장 깔고 물을 부어 담뱃재가 흐트러지지 않게 해 줬다.

"너 지난번까지는 담배 안 피웠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피우고 있는 거야? 언제 배웠어?"

"내가 일문과잖냐? 내가 전에 얘기했지? 나 일본 이름도 지었다고. '미도리'."

"아! 그래서 말보로 피우는 거야? 왜 하루키 책에서 미도리가 말보로 피우잖아."

"그랬나? 아무튼 선배들이 그러는데, 어문계열 여학생들은 이런 거 좀 피워줘야지 어떤 고뇌에 찬 듯 멋있어 보이고 글도 잘 써진다고 하더라. 자꾸 피우라고 권해서 나도 좀 해보는 거야. 얼마 안 되긴 했어. 사실 아직은 적응이 안돼." 살짝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담배와 또 이 카페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뭐 은근히 어울려 보이기도 하네."


이렇게 입학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그전까지 피우지 않던 나도, 또 내 친구들도 유행처럼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여학생은 아니겠지만 당시 남학생들 흡연율은 70%를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대학생이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나와 담배를 피워댔다. 남학생들은 강의실에서부터 불을 붙이며 나와서 복도를 걸어 1층 잔디밭의 따뜻한 햇볕을 맞으면서 담배 연기를 내뱉었고, 여학생들도 화장실이나 여학생휴게실에서 많이 피워댔던 것 같다. 누가 뭐라던 상관없다고 하는 일부의 여학생들은 계단 한편에 앉아 남학생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건물의 구석마다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고, 건물 자체에도 담배 냄새가 찌들어있었다. 난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 이 냄새는 말보로, 이 냄새는 필립모리스와 같은 것을 알게 되기도 했고, 88 멘솔이나 던힐 멘솔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별사탕 나눠주는 것처럼 친구들에게 하나씩 피워보라고 건네면서 바꿔 피우기도 했었다. 군대를 다녀온 몇몇의 90년대 초반 학번 선배들은 양담배 피우는 싹수없는 신입생 놈들이라면서 우리들이 들으라는 식으로 옆에서 욕을 해대고 있었고, 특히 마일드세븐 같은 일본 담배 피우는 애들의 담배를 집어다가 던지는 사람도 아주 가끔(아니면 한 번 정도) 있었다. 아무튼 수업 중에 담뱃갑을 책상에 올려놓아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던, 모두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유행이 어떻게 시작되어 그 분위기를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 시대에 퍼져있는 어떤 분위기가 있고 이는 유행이 되어버린다. 대학생들이 모두 담배를 피우던 그 당시에는 감각적인 분위기가 유행이라고 했다. 기억에 남는 건 9시 뉴스에서 X세대들이 감각적이기만 한 음악을 듣는다며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띄워놓고 논평하는 것을 봤던 것 같다. 그 밖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작가, '은행나무 침대'와 같은 영화처럼 감각적인 뿐 의미가 없고, 교훈이 없으며, 엉망진창의 문화가 유행이라는 식으로 여러 칼럼에서 기사가 나오고 있었지만, 우리 친구들 중에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냥 수업을 듣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또 그 아무 의미 없다는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요즘 학생들은 옷차림이 그게 뭐니? 아주 동네 바닥을 지들이 다 청소하고 다녀요." 당시에 학생들이 입던 바지를 두고 어른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땐 신발보다 길게 늘어뜨려서 바지 뒷단은 올이 다 풀린 채로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아무튼 어디서도 칭찬을 못 듣던 때였던 것 같다. 남들 하니까 다 똑같이 따라 하고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세대라고 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남들 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오니 이번엔 너도나도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대학교 입학할 당시에 아무도 관심이 없던 공무원이 IMF 이후에는 갑자기 세상 제일 좋은 직업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것도 유행인가?


그 생각 없이 산다고 평가받던 세대는 이제 중년이 되어 MZ세대를 평가한다. 중년이 되면 평가하기 시작하는 것도 유행인 것 같다. 회사에서 만난 MZ세대 얘기를 실컷 하다가 건강 얘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넌 아직도 담배 피우냐?" 요즘 대학교 동기들 모임에 나가면 한 번씩 들리는 얘기다. 전에는 서로가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던 담배를 이젠 끊지 못했다고 비웃는다. 유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후딱 변한다. 누가 그랬냐는 식이고, 그 전의 모든 옹호 논리는 지금의 반대 논리가 되어버린다. 한때는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친구를 보면, '쟤네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쩌면 촌스러운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그 수많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자신을 지킨, 인생 2회 차를 사는 듯한 사람들이다. 그깟 유행은 조금 지나면 다 없어질 것들이다. 매년 열풍이 분다. 몇 년 있으면 다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없어질 확률이 높다. '휩쓸리지 말자.'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요즘엔 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한다. 아무리 멋있어 보이게 광고와 영화, 음악에서 얘기해도 휩쓸리지 않고 싶다. 이제는 나를 지키고 싶다.




오늘로써 술을 마시지 않은지 10일째가 되었다. 이번주는 위험했다. 술을 엄청 좋아하는 대형 거래처 사장을 만났고, 평소에 같이 재밌게 지내고 있는 동종 업계의 회사 대표도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이 두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담배를 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혓바닥이 살짝 간질거리고 피부에 수분이 조금 더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던 한 주였다. 아무튼 군생활 이후 10일 연속하여 금주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어, 뿌듯한 마음으로 이 연재의 두 번째 이야기를 올려본다.

이전 01화 넌 나의 친구가 될 줄 알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