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바우처를 유산으로 처음 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by 로에필라

아침 9시쯤 항생제 링거가 끝나가서 링거를 다 뽑았다.



그리고 오전 9시 30분쯤 퇴원약이 나와서 약을 받고, 설명을 들었다.


다음 예약은 일주일 뒤, 금요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가고 싶은 시간에 병원을 갔었다.

하지만 이 병원은 시간을 다 정해줬다.


"다음 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어요. 하지만 피검사를 해야 돼서 2시간 전에 와야 해요. 피검사 결과 나오는 데 2시간쯤 걸리는데 진료 전에 결과가 나와야 하거든요. 그러니깐 오전 8시 30분에 피검사를 받아야 해요."


오전 8시 30분이면...... 지옥철을 타야 한다!!

핸드폰에 있는 캘린더에 시간을 잘 적어놨다.

놓치지 말고 잘 와야겠다.


빨리 퇴원하고 싶은데 남편이 미적거린다.

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 쉬고 있어. 천천히 나가자."

이 병원의 공식적인 퇴원시각은 오전 11시 이기 때문에 지금 나가면 빨리 나가는 거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호텔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나가는 게 아니다.


"난 여기에서 너무 끔찍한 일을 겪었어. 오래 있고 싶지 않아. 빨리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어."


내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서 주섬주섬 정리정돈을 하고 퇴원준비를 한다.


"어제부터 너무 집에 가고 싶었어. 하지만 병원에 있어야지 최대한의 조치를 받을 테니까 남았던 거야. 이젠 정말 집에 가고 싶어."


남편과 나의 소중한 보금자리로 단 둘이 있는 파라다이스로 가고 싶다. 남편은 내 배낭과 남편의 가방을 양 어깨에 메고, 기내용 캐리어를 끌었다. 내가 가방 하나를 들려고 했지만 들지 못하게 했다. 그게 남편 마음이 편하다면 난 힘을 쓰지 말아야겠다.


퇴원수속은 다 남편이 해줬다.

임신바우처로 결제를 했다.


임출산 정부지원금 100만 원 중에서 잔여금액이 318,250원이라는 문자가 왔다.


1인실 병실 비용이 많이 나왔으나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덕분에 남편과도 편하게 있을 수 있었고, 내 마음도 더 편했다.


사복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팔뚝에 멍이 많이 보였다.

피를 많이 뽑히긴 했다.




남편은 어플로 택시를 불렀다. 병원 바깥은 햇빛이 쨍쨍 비추고 있었다. 남편은 햇살이 너무 뜨거운 걸 보고 그늘 아래 있으라고 했다. 남편은 유산 이후 나를 유리인형 다루듯이 한다. 그늘에서 나와서 남편 옆으로 갔다. 혼자 그늘 아래 있는 것보다 택시를 부른 위치에서 기다리는 남편 곁에 있는 게 더 좋다.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갔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문 앞에 커다란 스티로폼박스가 있다. 엄마가 미역국과 반찬들을 택배로 보내셨다. 남편은 택배를 뜯어서 냉장고에 반찬통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병원에서 아프고 긴장해서 못 잤던 게 쌓였나 보다.


입원 첫날, 나는 한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자정 전에는 오한과 복통으로 고통스러워서 못 잤고, 그 이후 새벽 내내 혈압이 떨어져서 15분 간격으로 간호사의 전담 체크를 받느라 자지 못했다.


새벽 내내 간호사가 와서 링거의 종류를 바꾸고, 용량을 조절하고, 혈압을 재느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데 남편은 보호자 침대에서 너무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렇게 깊게 자는 남편의 모습은 위안이 된다.


병실 침대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잠에 든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런 걱정이 안 되는 편안한 모습.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집에 오니 긴장이 풀려서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자다가 남편이 깨워서 일어났다. 눈을 뜰 때 비몽사몽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잠들었었구나!'


"점심 먹고 약 먹어야지."

거실에 나가보니 식탁에 밥과 미역국이 차려져 있었다. 남편은 내가 자는 사이에 집안일을 다 해 놓았다. 너무 고맙고 감동적이었다. 엄마와 남편의 사랑이 담긴 따뜻한 점심 식사를 했다. 그 어떤 유명한 맛집보다도 더 맛있었다. 날 생각해 주는 정성과 날 아끼는 마음이 가득 담긴 점심식사였다.


남편은 내가 잠이든 모습과 미역국을 먹는 모습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우리 부모님께 카톡으로 보냈다. 그러고 보니 퇴원했다고 말도 못 했다. 엄마아빠는 그 사진을 보시고 안심하셨다.



밥을 다 먹자 남편이 옆에서 약을 내밀었다.

"점심에 먹어야 할 약이야. 항생제도 있으니까 꼭 먹어야 해."


남편은 약에 대한 설명을 다 읽고, 약봉지를 뜯어서 오늘 점심에 먹어야 할 약들을 모아서 먹기 좋게 주었다.


남편이 너무 헌신적이다.

남편을 너무 잘 얻었다.


저녁에도 저녁밥을 다 먹고 나서 저녁에 먹어야 할 약들을 챙겨서 줬다.



육각형의 약은 자궁수축을 돕는 약이다. 오늘도 기저귀를 차고 있다. 생리하듯이 피가 계속 나온다. 남은 태반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생리통보다는 더 강한 통증이 계속되어서 타이레놀을 추가로 먹었다.


남편은 내 약을 계속 챙겨주었다.

피가 줄줄 흐르는 게 느껴진다.

배는 계속 아프다.


생리통을 잘 참는 편인데, 마약성 진통제를 수액으로 맞는 데에 너무 길들여져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이다.

모든 게 원만하게 해결되고 있다.

이 상황이 감사하다.


죽은 태아 생각은 안 하려고 한다.

생각하면 너무 슬퍼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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